세종은 어떻게 왕이 될 수 있었을까?

by KS posted Mar 25,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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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태조의 다섯째 아들인 태종은 아들이 넷이었는데 양녕대군, 효령대군, 충녕대군, 성녕대군이었다.


양녕대군은 어릴 때부터 세자가 되었다 그 자리를 동생에게 내준다.


여기서 한 가지 의문점이 생긴다.


왜 태종은 양녕대군 대신 충녕대군을 택한 것일까?


우선, 이들의 상반된 기질과 태도 때문이다.


양녕은 사냥을 좋아하고 활달하고 여색을 밝혔다.


반면, 충녕은 밤늦게 책을 읽고 눈병이 나도 공부하는 등의 바른 태도로 태종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태종은 충녕의 이런 태도를 바탕으로 '택현론'(어진 이를 후계자로 택한다)을 내세워 세종에게 왕위를 물려줬다.


둘째로, 양녕이 충녕보다 주관이 뚜렷했기 때문이다.


태종은 왕에 물러난 뒤에도 정치에 영향력을 행사하고자 했는데 주관이 강한 양녕보단 충녕이 태종에게 적합한 인물이었다.


셋째로, 외척에 대한 태종과 양녕의 다른 인식 때문이다.


양녕은 일찍이 세자로 임명된 만큼 많은 대신들이 그에게 붙고자 했다.


처가를 비롯해 태종의 처남인 민씨형제들도 그랬다.


하지만 신덕왕후 강씨로 인해 외척에 넌더리났던 태종은 외척에 대해 뿌리깊은 불신을 보였다.


그렇기에 처남들의 힘이 지나치게 세지자 그 중 둘을 죽였고 남은 둘도 왕에게 불만을 가졌다해서 사사(사약으로 죽임)했다.


이로 인해 양녕대군은 아버지에게 불만을 품었다.


하지만 충녕은 왕위 계승과 거리가 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세력이 모이지 않았고 외척의 힘도 약한 편이었다.


이런 점으로 인해 태종은 3남을 점찍었다. 


넷째로, 자신이 물러난 후의 상황을 우려한 것이었다.


양녕이 장남이긴 하지만 인물은 충녕에 비해 학식이 높은 인물은 아니었다.


태종 자신이 왕위다툼을 일으키고 겪은 이였기에 자신의 아들들도 그런 피바람을 겪지 않길 바랬다.


충녕과 그 밑의 사람들이 양녕의 왕위를 위협할 경우 그로 인한 갈등과 분쟁이 생길거라 여겼기 때문에 그런 점도 고려해 선택한 것이다.


마지막으로 태종은 다음 왕이 자신과는 다른, 새 시대를 열길 바랬다.


자신을 이을 다음 왕은 평화로운 시대를 열길 바랬다.


이런 면에서 충녕이 더 낫다고 느꼈기 때문에 그를 골랐다.


게다가 일부 세력은 고려가 망한지 20년이 넘었지만 조선을 인정하지 않았다.


이런 극히 반대파들을 포용하려면 양녕보단 충녕이 낫다고 생각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