묘청과 노무현

by KS posted Mar 31,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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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자겸의 난으로 고려 문벌귀족 사회는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자겸이 왕권을 떨어뜨리고 측근세력들을 제거해서 왕을 뒷받침할만한 배경이 약했다. 이 때 등장한 묘청은 정지상, 백수한 등과 함께 서경으로 천도하자고 왕에게 건의한다. 묘청은 개경의 기운이 쇠한데다 서경으로 도읍을 옮기면 새로운 분위기가 조성된다고 봤다. 또한 고려의 자주성을 세울 수 있어 서경으로 옮기면 36개국이 고려에 복속해 금과의 사대관계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설득했다. 이에 인종은 서경에 대화궁을 지었다. 그러나 ‘서경천도운동’이라 불리는 이 시도는 김부식 등의 개경파의 반대에 부딪힌다. 거기에 서경에 천재지변이 생기자 인종은 천도를 취소하는데 이에 반발한 묘청은 난을 일으킨다. 이 난은 결국 김부식에 의해 진압된다.


   이와 비슷한 사례로 故 노무현 전 대통령의 예를 들 수 있다. 노무현 대통령은 대선에서 충청도의 유권자의 지지를 얻고자 행정수도 공약을 내걸었다. 이 공약으로 충남 출신인 이회창 후보보다도 충남에서 높은 지지를 받아 대통령이 되었다. 노무현 정부는 2003년 신행정수도특별법을 제정했고 국회의 동의를 받아 사업에 착수했다. 공약실행과 수도권 과밀 억제 및 균형발전이 그 목적이었고 최종적으로 공주, 연기지역을 선정했다. 여당 의원들과 당시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는 이에 적극적으로 찬성했지만 이명박 서울시장 등은 강하게 반대했다. 그리고 찬성측과 반대측은 헌법재판소에서 재판을 벌였고 결국 위헌판정을 받았다. 이에 참여정부는 신행정수도 대신 행정복합도시, 이른바 행복도시를 만들었고 이름을 세종시라 붙였다.


   두 사람은 나라의 새로운 행정적인 수도를 지으려는 공통점을 갖고 있었다. 이에 반대하는 세력도 있었기에 자신이 원하던 바대로 이루지 못했다. 하지만 두 사람의 목적이나 뜻을 이루려는 방식은 약간의 차이가 있었다. 묘청은 천도함으로서 고려의 국운을 융성시키고 자주성을 세우길 원했다. 반면 노무현 대통령은 국토균형발전과 공약실천에 중점을 뒀다. 또 그는 국회의 동의를 얻었지만 묘청은 그렇지 않았다. 묘청은 최고권력자의 동의를 구했지만 노 대통령은 자신이 최고권력자였다. 이렇듯 두 사람은 서로 살아온 시대나 환경은 달랐지만 서로 다른 듯 하면서도 유사한 점도 갖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