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순환 속에 사는, 우리 모두는 군인
-박근형, <모든 군인은 불쌍하다> 리뷰
사람들은 늘 바쁘다. 저마다 할 일이 있고, 이겨내야 할 순간들이 참 많은 우리들이다. 우리에게 있어 하루는 숨 돌릴 틈 없이 돌아가는 쳇바퀴나 다름없어 보인다. 수많은 사건, 사고에 둘러싸인 채 살고 있지만 쳇바퀴 안을 달리느라 주변을 볼 겨를이 없는, 우리 모두는 ‘바쁜’ 현대인이다. 현대인들에게 사회적 이슈라 불리는 일들은 말 그대로 하나의 ‘이슈’에 불과한 것 같다. 각 언론과 매체들의 전면을 화려하게 장식했던 뜨거운 감자들은 사람들의 관심을 한 몸에 받는가 싶다가도 몇 달, 혹은 며칠 후면 그 열기를 잃고 만다. 빠르게 돌아가는 세태에 따르기 위해서는, 무엇인가에 안주해 있으면 안 된다는 불안감 때문일까, 우리는 그것들을 너무 빨리 잊고, 지나친다. 그것들이 우리가 사는 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임에도 불구하고, 현대인들에게 수많은 사회적 이슈들은 아직도 대부분 ‘남의 일’이다.
그러나 불행 중 다행으로, 사회가 직면하고 있는 여러 사건 및 사고들이 완전히 잊히지는 않고 있다. 언제나 우리 주변의 뜨거운 감자들과 문제점을 예리한 눈으로 조명하고 있는 예술, 그중에서도 특히 ‘연극’이 있기에, 우리는 이 시대가 안고 있는 문제들을 피부로 느끼고, 그것들을 자연스럽게 자신의 삶의 일부로서 받아들일 수 있게 됐다. 현대에도 연극을 만드는 수많은 작가 및 연출가들을 비롯한 창작자들은 이러한 고민을 안고 작품의 창작과 집필에 열정을 쏟고 있다.
‘문제적 작가’, 박근형과 검열
사회에 집중하고 관심을 갖는 창작자들 중에서도 사회적 문제에 초점을 맞추고, 관객의 관심을 요구하는 연극을 만드는 것에 두각을 나타내는 작가는 단연 박근형이다. 박근형은 그의 다양한 작품들을 통해 사회 현상 전반에 대한 관객의 관심과 참여를 보다 적극적으로 유도하며, 한 집단 및 사회의 구조를 지배하는 다양한 요인들을 부각시키는 드라마투르기적 기법을 사용하여, 궁극적으로는 사회 비판을 꾀하고 관객에게 자기 성찰 및 사회 문제에 대한 관심을 촉구한다.
그는 자신의 최근작인 <모든 군인은 불쌍하다>에서도 앞서 언급한 자신의 신념 내지는 의지를 은근한 방식으로 투영하고 있었다. 박근형이 보여준 네 가지 군인들의 이야기는 우리가 잊고 있었던 뼈아픈 역사와 지난 사회적 이슈 등을 돌아보게 했다. 그는 이 시대를 사는 사람들이 안고 있는 문제들을 여러 상황 등에 빗대어 풀어내면서 효과적으로 드러내어 보여주었다. 한 마디로 그의 작품은 아주 ‘의도적으로’ 잘 쓰인 작품인 것이다.
하지만 이렇듯 잘 쓰인 박근형의 최근작도 손쉽게 무대화되지는 못 했다. <모든 군인은 불쌍하다>는 연극 무대에 오르기까지 다소 험난한 여정을 거쳐야만 했다. 역사, 사회의 이슈을 다루는 연극, 혹은 어떤 이데올로기에 대한 찬반의 의견을 담고 있는 작품들에 따르는 검열의 문제 때문이었다. 문화부 산하의 공공기관인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공연 지원 사업, ‘창작 산실’에서 우수 작품으로 선정되었던 박근형의 작품이 최종 당선작에서 배제된 것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
이러한 검열의 문제는 비단 박근형만의 고민거리가 아니다. 가장 자유롭고, 독립적인 환경에서 창작되고 발전해나가야 할, ‘연극’이라는 장르에 대한 정부의 검열은 이미 공공연하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일례로 세월호의 문제를 다루었던 <안산 순례길>이라는 작품에 대한 검열이 있다. 2015년 9월 언론 매체를 통해 보도된 바에 따르면, <안산 순례길>은 세월호를 다루었다는 이유로, 또 총 연출을 맡은 예술가가 ‘정치적’이기 때문이라는 이유로 2014년 겨울,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예술창작지원 정기공모 다원예술 분야의 지원금 심의에서 탈락했다. 앞선 사례들은 정부가 자신들과의 이데올로기적 대립을 주장하는 예술 작품에 대해 공공연한 검열을 행해왔다는 사실을 잘 보여준다.
그렇다면 예술 창작자들은 언제나 검열의 불안에 떨며 자신의 작품을 무조건적으로 수정해야만 하는 것일까? 답부터 말하자면, 다행히도 그렇지는 않다. 박근형의 <모든 군인은 불쌍하다>를 보라, 검열에 희생된 작품도 무대화가 아주 불가능하지만은 않다는 것이다. “현정권 하에서 검열의 문제를 겪었지만, 오히려 야당쪽 행정책임자 산하 단체의 지원을 얻은" 박근형의 작품은 성공적으로 무대화되었으며, 지난 사회와 이 시대의 문제를 효과적으로 조명한 문제적 작품으로 부상하게 되었다. 박근형의 예는 연극이 정치적 이데올로기에 희생되는 연약한 존재에 불과하지 않다는 사실을 잘 보여준다.
물론 예술가들에게 있어 검열이란 아주 외면할 수는 없는 존재이지만, 창작자들이 그것에 얽매여서는 안 될 것이다. 제 기능을 하는 것들이 몇 안 되는 시대에서, 연극이란 이 시대를 투영하고 관객들에게 당신들이 처한 현실을 보여주는 거울로서의 제 기능을 담당해야만 한다. 현대에는 박근형과 같은 고집 있고 의지적인 작가 및 연출가의 역량이 아주 중요하게 작용할 수 있고, 또 그러한 창작자들 덕에 사회에 대한 관심이 촉구되며, 사회의 발전을 도모하는 중요한 장이 마련되기 때문이다.
네 가지의 군인, 하나의 희생
박근형이 작품의 전면에 내놓은 것은 총 네 가지의 에피소드다. <모든 군인은 불쌍하다>는 네 가지의 큰 줄기가 뒤섞인 에피소드식 구성으로 이루어져 있다. 네 가지의 큰 갈래는 탈영병의 이야기와 카미카제(가미카제) 군인, 초계함의 군인들과 이슬람 테러리스트에게 납치된 파병 한국인의 이야기로 나뉜다. 이 네 가지의 이야기는 피상적으로 보면 각기 다른 시대를 살고, 각기 다른 경험을 한 군인들의 이야기로만 보일 수 있다. 그러나 각각의 에피소드에서 드러나는 상징이나 요소들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 낯선 군인들의 이야기가 어딘가 낯설지 않다는 것을 분명히 느낄 수 있다.
카미카제 에피소드는 네 가지 에피소드 가운데 유일하게 뼈아픈 역사에 의해 희생된 피해자를 다루고 있었다. 일제강점기 시절, 조선에 남아 학대당하느니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 사람이 되어 살겠다는 포부를 가지고 이민을 간 마사키 가족, 그리고 가족을 위해 카미카제 특공대에 들어간 미우라는 모두 시대에 희생당한 피해자들이다. 그중에서도 마사키는 가족을 위해 사회와 타협하고, 가족들의 안전을 위해 스스로 일본을 지키려 죽음에 뛰어드는 안타까운 인물로 그려진다. 자신을 끔찍이 아껴주는 어머니와 하나뿐인 동생을 두고 죽기 위해 전장으로 떠나는 마사키의 마지막 대사, “어머니. 보고싶습니다.”는 그 비극성을 극대화시켰다. 그는 일본에 점거당한 조선의 유약함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죽음을 선택하게 된, 일제 강점기 사회에 희생된 피해자를 대변한다.
이라크 에피소드는 이라크에 파병된 미군에게 식품을 납품하기 위해 전장으로 보내진 ‘동철’의 이야기다.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을 하기 위해, 목돈을 모으러 이라크에 파병을 간 동철은 군수물자를 운반하다가 이슬람 테러리스트 조직에 납치된다. 정 많은 아스나 덕에 목숨을 건지고, 한국과 이슬람 테러조직 간의 협상 타결을 위한 인질로 사용된 그는 한국군의 파병 철수가 무산되자 무참히 희생된다. 마지막 장면에서 난희와 동철이 동시에 등장해, 서로 다른 공간에 있지만 함께 있는 듯한 모습을 그려낸 것이 안타까움을 자아내고 있었다.
동철은 국가를 위해 희생된 안타까운 개인의 모습의 표본이다. 박근형은 그를 통해, 2004년 이라크에서 미군에게 군수물자를 지원하던 김선일을 떠오르게 한다. 그는 동철과 마찬가지로 아랍어과를 전공했고, 미군에 납품을 했다가 이슬람 테러 조직에 의해 피랍되었다. 또한, 당시 이슬람 테러 조직은 그를 한국군 철수를 위한 인질로 썼고, 결국 철수가 무산되자 무참히 살해했다. 이라크 에피소드에서 발견한 수 있는 이런 점들은 김선일 피살 사건을 떠올리게 하고, 잠시 잊고 있었던 당시의 안타까운 상황을 재조명하게 했다.
네 가지 에피소드 가운데 가장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는 2010년, 서해 백령도 부근 초계함의 해군들을 다룬 초계함 에피소드였다. 초계함 에피소드는 작품에서 총 세 번 등장하는데, 정해진 이름 없이 나일병, 안이병, 임하사, 박상병, 오대위, 김소령 등 직급의 이름으로 불리는 인물들은 두 번의 등장 장면에서 똑같은 대사를 반복한다. 깜짝 생일 축하를 받은 이야기와 아기가 처음 빠, 빠라며 자신을 불러준 이야기, 유통기한이 지난 샌드위치를 먹고 고생한 일, 결혼을 약속한 사람과 군함에서 투닥거리던 일 등. 인물들은 똑같은 감정으로, 똑같이 자신의 이야기를 반복할 뿐이다. 그 가운데에서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다고 말하는 안이병은 어딘가 불안해 보이는 태도를 유지하다가, 초계함 에피소드가 끝나는 마지막 장면에서야 사실 모든 게 다 기억난다고 울먹이며 털어놓는다. 앞서 자신의 이야기들을 반복했던 인물들, 즉 안이병을 제외한 모든 인물들은 초계함 사건의 희생자이며, 안이병은 이 사건에서 살아남은 유일한 목격자다.
초계함 에피소드를 보며 떠오르는 것은 2010년에 발생했던 ‘천안함 사건’이다. 박근형은 직접적인 표현을 사용하지 않았지만, 에피소드 안에 천안함 사건을 떠오르게 할만한 여지를 많이 남겨두고 있었다. 예를 들어 백령도 부근이라든가, 초계함이라는 단어 선택, 2010년이라는 시대 설정이 그러했다. 정부의 주장에 의해 북한의 어뢰 공격에 의한 침몰로 마무리된 천안함 사건은 아직까지도 진상 규명이 명확하게 되지 않은 채 남겨져 있으며, 곳곳에서는 정부를 향한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기도 한다. 하지만 이 사건의 진상 규명을 하기에는 그에 따르는 어려움이 너무나 많다. 이 에피소드를 통해 박근형이 말하고 싶었던 것은, 우리가 나서서 천안함 사건의 진상 규명을 하자는 것은 아닐 것이다. 다만 그 사고를 겪은 군인들과 그 가족들, 그리고 참혹한 현장에서 살아돌아온 몇 명의 군인들을 다시 한 번 생각해보고 잊지 말자는 의도에서였으리라. 박근형은 나름의 방식으로 천안함 사건의 피해자들과 당시를 재조명한 것이다. 이름 없이 직급으로 불리는 그들은, 개개인을 존중하지 못하는 사회에 희생된 피해자들이다.
작품의 맨 처음과 끝을 장식하는 것은 2015년, 전역 한 달을 남기고 군대에서 탈영한 병장의 이야기다. 자신이 속한 ‘사회’에 환멸을 느끼고, 그로부터 도피하듯 굳이 가지 않아도 되는 군대에 자원한 그는 군대에서도 사회의 모습을 보게 된다. 또 다른 사회의 모습을 한 군대로부터 도망친 탈영병은 아이러니하게도 다시 사회로 도피한다. 그리고 어느 곳에도 적응하지 못하고 도피하기만 하는 자신에게도 비슷한 환멸을 느끼게 된다. 그런 그를 온전히 이해해주려고 노력하며, 그의 이야기를 곧이곧대로 들어주는 것은 아버지도, 목사도 아닌 생면부지의 중년 여성뿐이다. 다시 돌아온 사회에서도 적응하지 못한 채 방황하던 탈영병은 결국 죽음을 선택한다. 그가 군대로 복귀를 하거나, 재입대 후 제대해 사회로 돌아오는 것 모두 선택하지 않고, 결국 자살을 시도하려고 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답은 자신이 어떤 선택을 한다고 한들, 변하는 것은 하나도 없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기 때문이리라. 시간이 지나도 여전히 사회는 낯설 것이고, 여전히 군대는 사회의 모습을 하고 있을 것이며, 여전히 그는 방황할 것이다.
탈영병의 모습은 현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다. 실은 그와 우리가 아주 많이 닮아있다고 말하는 것이 조금 더 가까울지도 모르겠다. “안 맞는 신발”을 신고 “자갈길”을 걷는 우리의 모습이 그대로 투영된 듯, 탈영병의 모습은 낯설지 않게 다가온다. 박근형이 탈영병의 에피소드를 통해 보여주고 싶었던 것은 아무래도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이 아니었나 싶다. 더 구체적으로는 불확실한 미래 때문에 방황하고 있는 청년들과, 전쟁 같은 하루를 치르고 있는 이 땅 모든 사람들의 군상을 그려내고 싶었던 것 같다. 다시 말해, 탈영병이 상징하는 바는 이 사회의 구조와 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 때문에 희생당한 우리들의 모습인 것이다.
이처럼 각각의 에피소드는 저마다 다른 진행 방식을 보이지만 결말은 하나, 등장인물의 희생으로 귀결된다. 이는 각 인물들의 죽음을 통해 비극적으로 조명된다. 저마다 다른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삶을 영위하고 있고, 다른 시대를 경험하는 인물들이지만 그들 모두는 국가를 위한 ‘사회’에 희생당한 피해자들이다.
악순환의 고리, 우리 모두는 군인이다
앞서 말했듯, 작품은 탈영병의 이야기로 시작해 탈영병의 이야기로 끝을 맺는다. 그 사이에 네 가지의 에피소드는 저마다 시작되고, 진행되다가 끝을 맺는다. 각 에피소드들은 병렬적으로 구성되어 각기 다른 시대를 사는 인물들이 그들의 처음과 끝을 같이 하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그러나 잘 생각해보면, 이러한 구성은 단순히 동시에 네 가지 이야기의 시작과 끝을 보여주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만은 아닐 것이다. 하나의 에피소드는 사실 끝을 향해 흘러가고 결국엔 비극적인 결말을 맺는 하나의 이야기 고리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작품에 등장하는 네 개의 에피소드는 박근형이 그 고리를 풀어내 각기 다른 네 가지의 시대와 공간이라는 배경을 입히고, 반복해 보여준 것이나 다름없다. 즉, 네 가지의 고리가 <모든 군인은 불쌍하다>라는 작품 안에 들어있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 사회의 문제와 천안함 사건, 김선일 피살 사건과 가미카제로 희생된 조선 출신 군인. 이렇듯 아무렇지 않게 꺼내어 조명하기에는 조금 불안하고 위험해 보이는 네 가지의 이야기들은 각각의 고리를 형성하며, 의도를 위해 이야기 속에 남아있다. 다시 말해 “에피소드적 구조는 이미 내재적으로 순환적 구조를 암시하는 것”이고, 박근형은 사회구조적 특성상 반복될 수밖에 없는 병리적 현상들을 나열함으로써 이 사회가 금기시하는 부분에 대하여 조명을 가하고 있다는 것이다.
작품은 탈영병의 죽음으로써 마무리되었지만 끝나도 끝나지 않은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사회 구조’가 지속되기 때문에, 우리 모두는 순환적 구조 안에서 돌고 돌 수밖에 없는 운명들인 것이다. 박근형이 작품의 말미에서 탈영병 이원재 병장의 입을 빌려 말했듯, “우린 모두 전쟁 중이고, 우린 모두 군인”이기 때문이다. 살아간다는 것은 그의 말대로 일종의 전쟁이며, 우리는 각개전투를 해나가고 있는, 결국은 군인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