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니까 청춘이다’라는 값싼 위로에 만족해 하루하루를 허비하지 말길 바랍니다. 무한경쟁의 습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학점의 노예가 되어 취업준비로 4년을 보내는 어리석은 모범생이 되지 말기를 바랍니다.”
염재호 총장은 3월 2일 본교 입학식에서 신입생에게 이렇게 당부했다. 이제 막 대학생이라는 부푼 꿈을 안고 입학한 학생들에게 그가 전하는 따끔하고도 현실적인 충고였다. 염 총장의 말처럼 지금 대학에는 적성과 흥미보다는 현실과 타협하며 남들을 뒤쫓으며 살아가는 대학생이 많다. 또한, 대학에 가해지는 각종 규제와 구조조정의 압박으로 ‘학문의 상아탑’은 진퇴양난에 놓여있다. 이런 위기 속에서 염재호 총장은 고려대의 미래를 어떻게 그리고 있을까. 염 총장을 만나 그가 제시하는 비전과 앞으로의 계획을 들어봤다. 이번 인터뷰는 고대신문, KUBS, 영자신문사, 교육신문이 공동으로 진행했다.
- 반복해서 강조하는 ‘개척하는 지성’은 어떤 인재입니까
“지금 대학사회에는 정형화된 나약한 지성들만 있다. 20~30년 전 정보에 매몰돼 미래사회가 얼마나 빨리 변하는가를 알지 못한다. ‘고려대에 입학했으니 이젠 됐어’라는 기대는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고려대 졸업장만으로는 21세기에서 절대 성공하지 못한다. 편안한 크루즈가 오기를 기다리지 말고, 자기가 스스로 뗏목을 만들어 미지의 세계로 항해하러 나가야 한다. 21세기는 스페셜리스트가 보다 프로페셔널이 중요하다. 프로페셔널은 문제해결능력이 뛰어나야 한다. 대학에서 문제해결능력을 배워 사회에 나가 자신의 역할을 수행하는 인재가 바로 개척하는 지성이다.”
- ‘사립대의 위기’라고 합니다
“정부의 전체 교육예산 중 고등교육이 받는 예산은 10%도 안된다. 대학은 초·중·고에 비해 지원은 적은데 규제는 가장 많다. 특히 사립대는 국공립대에 비해 교육부로부터 받는 재정적 지원에서 현저하게 차이가 난다. 초·중·고 교육이 황폐화 돼서 학부모들은 자녀를 좋은 대학에 보내기 위해 엄청난 사교육비를 쓰는데, 막상 대학에게는 등록금을 올리지 말라고 한다. 이것이 정당한 논리라고 할 수 없다. 게다가 국공립대와 사립대간에는 교육재정 지원에서 엄청난 차이가 있다. 이들 대학 간에 고등교육에 하는 역할에 차이가 있지 않다. 도리어 국공립대에 몰리는 과중한 재정지원을 사립대로 조금만 돌린다면 더욱 큰 학문적 교육적 효과를 낳을 것이다. 이러한 불편한 진실을 계속 얘기해야 한다. 사립대 문제는 앞으로도 강하게 얘기할 것이고, 주요 사립대가 연합해 계속 목소리를 내야 한다.”
- 교수, 직원, 학생이 만나 얘기하는 자리가 부족하다는 지적이 있다.
“학교 행정이 밀실행정이라는 생각은 소통의 문제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이번부터 처장회의, 교무위원회 회의내용을 다 포탈에 올린다.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알리려는 것이다. 하지만 대학은 교육기관이고 학생은 피교육자다. 학생의 의견을 들어야 하는 건 맞지만, 학생은 교육을 받는 입장이지 정책 결정 등에 동등하게 참여하는 주체는 아니다. 이 인터뷰 직전에 총학생회장단을 만났고, 앞으로도 자연스럽게 많이 만나려 한다. 학교 구성원간에 신뢰를 쌓아 미래지향적인 합의를 이끌어 낼 것이다.”
- 행정학자로서 민주성, 효율성, 공익성을 강조했다. 본교 행정시스템의 문제는 무엇이며, 어떻게 바꿀 계획인가
“고려대의 행정은 다른 대학에 비해 많이 앞서 있고 안암캠퍼스의 360여 명의 직원선생님들 헌신적으로 수고해주고 있다. 하지만 지금보다 속도가 3배 이상 빨라져야 하며, 결재 라인도 지금의 3분의 1이상으로 줄여나갈 것이다. 행정은 끊임없이 혁신해야 한다. 과거의 방식에 머무른 채 계속 새로운 것들을 덧붙이기만 하면 행정이 너무 둔해진다. 미래에 걸맞는 버리는 행정이 필요한 것이다. 현재 행정개혁위원회를 만들어 운영 중이며, 1학기가 지나면 시스템이 많이 개혁될 것이다.”
- 지속적으로 시설이 개선되고 있으나, 강의시설이나 연구시설은 여전히 부족하다.
“개선계획이 있다. 구체적으로 이야기하긴 어렵지만 SK관이나 민주광장 개발도 고려중이다. 하지만, 행정계획과 같은 맥락에서 무조건적으로 증축하는 것은 옳지 않다. 현재 본교 강의실의 실제 이용률은 매우 낮은 편으로, 이를 효율적으로 쓰는 방안을 고려해야한다. 강의실 뿐만 아니라 학생자치공간도 좀 더 깨끗하고 효과적으로 이용하는 개선방안을 강구하고 있다.”
- 한 학기 16주 체제를 벗어난 유연학기제 도입을 표명했다. 다른 학교와의 학점교류나 교환학생의 경우 학사적인 문제가 우려된다.
“약간의 혼란은 있을 수 있지만, 항상 혁신하고 개혁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현재는 1주일에 3시간, 총 16주 48시간이 기본인데 원하는 사람은 1주일에 5시간씩 10주 안에 학기를 끝마칠 수 있도록 하는게 유연학기제다. 3월 1일에 개강하면 5월 중순에 학기가 끝나 여름에 인턴, 해외활동 등을 자유롭게 할 수 있고, 교수도 유기적인 시간 활용이 가능해진다. 지금보다 선택의 폭을 넓혀서 유연하게 운영하겠다는 거다. 물론 행정적인 어려움이 따르기에, 이와 관련한 TFT를 만들어서 구체적인 시스템을 논의하고 있다.”
- 출석부, 상대평가, 시험감독을 없애는 3무(無)정책이 비현실적이라는 지적도 있다.
“유연학기제와 마찬가지로, 의무적으로 3무를 하겠다는 게 아니라 유연하게 운영할 계획이다. 지금은 교수가 컴퓨터에 수업정보를 입력할 때 학생이 얼마나 출석을 했는지 반영해야 하는데 그런 시스템을 없애겠다는 것이다. 교육부에서는 수업일수의 2/3이상 출석을 부르도록 하지만, 고려대는 다르다고 생각한다. 출석을 부르지 않아도 학생들이 스스로 열심히 듣는 게 중요하다. 상대평가도 지금의 제한 규정을 풀겠다는 거고, 시험감독이 필요한 경우엔 하게 할 것이다. 학생의 명예를 존중해 감독 없이 시험을 보는 스탠포드대학처럼 고대생의 명예와 자존감을 믿는다.”
- 제3캠퍼스 구상계획을 밝혔는데, 세종캠퍼스와는 어떻게 다른가
“세종캠퍼스는 ‘캠퍼스화’에 집중하고 있다. 안암캠퍼스에는 없는 북한학과, 고고미술사학과, 미디어문예창작학과 등 특색있는 학과를 통해 다른 지방대와는 다른 경쟁력을 갖추는 것이다. 제3캠퍼스에는 10년 정도는 학부가 아닌 전문대학원, 싱크탱크, 산학협력연구시설 등을 갖춰 기초를 다져놓고 학부는 나중에 옮겨갈 예정이다. 세종시 차원에서도 제3캠퍼스가 좀 더 미래지향적이고 글로벌한 교육공간이 되기를 희망하고 있다.”
- 본교 외국인 학생이 증가하는 가운데, 이들의 수학능력이 뒤처지는 경우가 많다. 외국인학생의 선발과 사후관리를 어떻게 할 예정인가
“2020년까지 현재 대학 정원인 56만 명을 40만 명으로 줄여야 한다. 이 파장은 고려대에게도 압력으로 들어올 것이다. 이 위기를 오히려 기회로 삼아서 외국인 학생들을 적극 유치할 예정이다. 다만, 오는 학생을 다 받아서 그 중에서 선발하는 식이 아니라, 학교가 직접 리쿠르트(recruit)를 해야한다. 현재 한국인 학부생의 장학금 수혜율은 30~40%인데 외국인은 5% 정도다. 이를 30%까지 올려야 하고, 뛰어난 학생은 적극적으로 골라와야 한다. 또한, 한국학 전공 등 새로운 융합전공을 만들어서 외국인 학생들이 본 전공 이외에 한국을 충분히 이해하고 한국어 능력도 갖춰 대학강의를 따라가도록 돕겠다. 이를 통해 그 나라의 리더로 성장하게 하려고 한다.”
조소진 편집국장, 이예원 취재부장 news@kuke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