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득 그들을 직접 만나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병역을 거부하는 이유도, 방법도 각각 다른 그들에게서 법정에선 이야기하지 못했던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보고 싶었다. 수소문 끝에 연락이 닿은 그들은 놀라울 정도로 당당했다. 이름도, 얼굴도 숨기지 않았다.
20대의 시기에 양심에 따라 소수자의 길을 선택한 그들에게 20대에게 전하고 싶은 말을 물었다. 고민을 해달라고 했다. 그들이 말하는 고민은 무엇일까. 그리고 우리는, 그들의 이야기를 통해 어떤 고민을 할 수 있을까.
박유호 (28, 입영거부)
왜 병역거부를 결심하게 됐냐는 질문에 박유호 씨는 2009년을 이야기했다. “평화캠프라는 곳에서 활동하며 강남 중심에 위치한 판자촌인 포이동 266번지에 공부방을 만들었어요. 2009년 1월에 철거가 백지화됐다는 이야기가 들리자 포이동은 축제 분위기였죠. 하지만 이틀 뒤, 용산에서는 강제철거로 인해 참사가 일어났습니다.” 불길과 연기냄새를 마주하며, 그리고 사람들을 짓밟는 경찰들을 보며 그는 국가의 폭력적인 시스템에 문제를 제기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사진 | 서동재 기자 awe@ |
그는 문제제기의 방법으로 왜 하필이면 병역거부를 선택했을까. “군은 폭력적이고 위압적인 시스템의 문제점을 그대로 드러내는 곳이에요. 전쟁도 없는 상황에서 매년 500명의 장병이 죽어나가도 아무도 문제제기를 하지 않죠. 대부분은 그저 남자라면 당연히 가야하는 곳이라고들 이야기해요. 하지만 병역의 의무는 정말 명예롭고 신성한가요?” 그는 군대를 다녀온, 그리고 군대에 가야 할 사람들이 문제를 제기하지 않으면 지금의 군이 자식세대에게도 똑같이 되물림 될 것이라고 말했다. “군 내부의 부당함에 솔직해졌으면 좋겠어요. 상처를 훈장으로 포장하지 말자는거에요.”
그의 아버지는 6급 장애인이다. 다리가 불편하다고 했다. “아버지가 그러셨어요. 당신은 다리를 저는 것 하나 만으로도 숱한 차별을 겪고 살아왔는데 저는 더 심한 차별을 받을거라고요. 그에 저항하며 살겠노라 말씀드리니 아버지는 고개를 끄덕이셨어요. ‘그래, 너는 우리 같은 사람들을 위해 세상을 바꾸려고 사는가보다.’ 그 한마디가 그렇게 크게 다가오더라고요.”
그를 만난 것은 선고공판 하루 전이었다. 지금의 감정은 어떠느냐고 물었다. “사실 지금은 담담해요. 가족들도 다 올라오겠다는데 한사코 말리고 조용하게 수감생활을 준비하고 있어요.” 때마침 그 날은 광주지법에서 병역거부자에게 무죄판결을 내린 날이었다. 그는 자기도 무죄 판결을 받는 것 아니냐며 웃었다. 다음날, 그는 서울서부지방법원으로 향했다. 판사는 그에게 유죄를 선고했다. 1년 6개월, 실형이었다.
▲ 사진 | 서동재 기자 awe@ |
유정민석 (33, 군 복귀거부)
유정민석 씨는 전경으로 복무하던 중 병역거부를 선언했다. 성 정체성 때문이었다. 남성성을 강요받고 성 소수자에 대한 억압이 공공연하게 이뤄지는 조직에서 더 이상 견디기가 힘들었다. “자대배치를 받기 전 박노자 교수의 <당신들의 대한민국>이라는 책을 읽었어요. 군대 문화에 대한 신랄한 비판을 접하니 고민은 더욱 깊어졌습니다. 이데아 세계를 본 사람은 다시 동굴로 들어가지 못한다는 플라톤의 말처럼, 냉소의식은 더욱 깊어졌죠. 장기간 휴가를 얻어 여러 사람을 만나고 자료를 찾아본 후, 결국은 부대에 복귀할 수 없다고 전했습니다.”
그는 재판을 진행하며 공개적으로 자신이 병역을 거부하는 이유를 밝혔다. 미디어를 통해 커밍아웃을 하고, 적극적인 활동을 이어갔던 과거에 대해 그는 ‘치기’였다고 했다. “벼랑 끝에 서니 뭐든지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공개적인 혐오를 겪으며 후회를 하기도 했죠.” 자신의 정체성과 혐오에 대한 고민을 이어간 그는 대학원에 진학해 철학을 전공했다. 건전하지 못한 군대를 신성시하는 문화가 남성들에게 박탈감을 안기고 여성 비하로까지 이어진다는 설명 속에는 자신이 겪었던 일들에 대한 흔적이 남아있었다.
그는 병역거부와 커밍아웃이 비슷한 측면이 많다고 했다. 자신이 홀로 그 무게를 전부 짊어져야 한다는 이유에서다. “사실 성 정체성 때문이든 개인의 양심 때문이든 병역거부를 그렇게 권장하고 싶지는 않아요. 가족과의 갈등은 물론 주변의 따가운 시선이 생각보다 아프게 다가오니까요. 하지만 결국 선택은 본인의 몫이고, 도움이 필요하다면 기꺼이 그들을 도울 생각입니다.”
박은성 (, 예비군 훈련거부)
박은성 씨는 군 복무를 마치고 2006년 예비군으로 편성된 뒤 2007년 11월 여호와의 증인 침례를 받았다. 어머니의 영향이었다. “여호와의 증인이신 어머니의 영향으로 성서의 내용을 어느 정도는 알고 있었지만 증인이 되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2007년 겨울에 어머니와 같이 성서 공부를 하며 결심이 섰어요.”
그는 ‘다시는 전쟁을 준비조차 하지 말며’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는 성서의 구절을 보여줬다. “저는 군에서 박격포를 쐈습니다. 하지만 성서에 따른 삶을 살기로 했으니 이제는 훈련을 받을 수 없어요.” 그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남을 해치고 싶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단순히 국방의 의무라고 해서, 조국에 대한 사랑이라는 명분으로, 폭력적인 행동을 하고싶은 사람은 없을거에요. 분명 사람을 해치지 않고도 이런 것들을 실천할 수 있어요. 그런 고민이 사회적으로 이뤄지지 않는 것이 아쉽습니다.”
그는 지난 8년간 30회 이상 기소당했다. 훈련을 거부할 때마다 정당한 사유가 아니라는 이유로 경찰과 법정에 불려갔다. 당연히 정상적인 생활은 불가능했다. 대형 레스토랑에서 조리를 하던 그는 결국 일을 그만둬야했다. 한 번에 300만원 씩 청구되는 벌금을 감당하기 위해 지하철역에서 토스트를 팔며 생계를 유지했다. “지금은 그래도 보험회사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업무 시간에 구애받지 않는 직업을 찾다보니 그렇게 됐네요.”
그는 이러한 상황이 여전히 이어지고 있지만 어느 때보다 행복하다고 했다. 몸은 힘들고 지치지만 마음만은 편안하다는 것이다. “저의 믿음에는 전혀 변함이 없어요. 예상했던 일이니까요. 종교적인 이유로 죽음을 감내해야 하는 역사도 있었는데, 저는 그래도 발 뻗고 잘 수 있으니 행복한 셈이죠.”
이예다 (25, 병역거부 난민)
이예다 씨는 병역 거부를 이유로 최초로 난민 지위를 획득한 한국인이다. 그는 현재 프랑스 파리에 거주하며 다른 병역거부자와는 다른 삶을 이어가고 있다. “프랑스로 건너와 난민의 지위를 획득하기까지 1년 동안은 거의 노숙을 하다시피 지냈어요. 이후 1년간은 베이글 가게에서 일하며 생활비를 벌었구요. 지금은 그간 여유가 없어서 즐기지 못했던 새로운 문화를 느끼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가 한국을 떠난 지는 3년이다. 한국에서 병역을 거부했다면 출소 후 약 1년하고도 6개월이 지났을 시기다. 그는 한국에 남았더라면 이런 삶을 누리지 못했을거라며 그만큼 한국의 인권이 열악하다는 사실을 이야기했다. “특별할 것이 없는 제가 이런 삶을 누리며 느끼는 것이 있다면 그만큼 한국의 정부와 국방부가 청년들에 대한 처우가 최악이라는 것입니다. 한국의 청년 남자들은 2년 이상의 기간을 국가를 위해 헌신하지만 무급착취 수준의 대우를 받고 있어요. 국가는 ‘국군장병 여러분에게 감사드린다’고 말로만 표현할 것이 아니라 그들의 젊음에 상응하는 최소한의 대우라도 해줘야 해요.”
왜 난민이어야 했을까. 그는 여러 이유를 들었지만 결국은 ‘자신이, 그리고 모두가 행복하기 위해서’였다. “한국의 군대가 잘못됐다는 것을 알면서도 병역거부문제 개선에 힘을 쓰지 않는 것은 타협이잖아요. 만약 저의 난민신청이 받아들여진다면 한국의 강제징병이 반인권적이라는 것을 잘 보여주는 사례가 될 거라고 생각했어요. 난민신청이 스스로에게도 떳떳해지고 다른 병역거부자들의 처우도 개선시킬 최선의 방법이었기 때문에 고될 것이란 걸 알면서도 이 길을 선택했습니다.”
그는 한국에 돌아오지 못한다. 그럼에도 후회는 없다고 했다. “한국에서의 삶은 외롭고 고독했어요. 지금은 세계 각지에서 저를 지지해주는 많은 분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눌 수 있어요. 보고 싶은 사람들은 프랑스나 일본에서도 간간히 만나고 있고 무엇보다 지금은 ‘살아있다’는 느낌이 들어 좋아요.”
한국의 사람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있냐는 질문에 그는 병역거부권이 세계적인 인권범주에 속한다는 것을 알아달라고 했다. “저는 병역거부 사유만으로 난민으로 인정받았어요. 사실 병역거부자의 인권을 보장하는 것은 군인의 인권을 증진시키는 것과 결코 다르지 않아요. 병역거부를 논의하기 위해선 군의 투명성이 담보돼야하니까요. 이런 인권의 확보는 결국 삶의 질 향상을 불러오고 나아가 평화에 대한 의미를 숙고할 여유도 가져다 줄거라고 생각해요.”
김범석 기자 conan@kuke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