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홀로그램입니다!
이제 2월달을 맞이했네요!
다들 이제 방학이 한달도 안남으셨군요 ㅠㅠ
물론 졸업 준비하시는 분들도 계시구요 ㅎㅎ
더 좋은건 이제 곧 있으면 봄이 온다는 거네요 ^~^
곧 있으면 설인데, 모두들 긴 연휴만큼
즐거운 설 보내셨으면 좋겠습니다.
자 그럼 이번 칼럼 시작하겠습니다.
재일 한국인? 재일 조선인? 재일 동포? 재일 코리안? 뭐가 다르지?
재일 교포들은 본인을 재일 코리안, 재일 조선인, 재일 한국인, 재일 동포 등의 다양한 단어로 정의합니다.
재일 코리안은 북조선과 대한민국의 국가 구분을 넘어서 코리아라는 재일동포의 존재 자체를 강조합니다.
재일 조선인은 남북 분단 이전에 일본으로 넘어왔기에 본국을 조선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칭합니다. 또한 북한이 조선이라는 국호를 쓰고 있기에 북한의 정체성을 가진 분들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분단 전 조선과 북한의 조선, 두 가지 의미를 지녔다고 할 수 있지요.
남북 분단 전의 '조선'의 국민으로서의 정체성을 유지한 채 살아갈 수 도 있지만, 여권을 발급받아야하는 경우엔 대한민국과 북한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만 합니다.
재일 한국인이라 하면 대한민국 국적을 가진 재일교포입니다. 재일 한국인은 '재일본대한민국민단(약칭:민단)'과 주로 활동합니다.
조선인 민족학교에 대해 북한은 57년부터 정부차원에서 지원금을 보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조선학교를 친북성향이 있다고 말하고들 합니다만, 북한의 지침에 따라 학교가 운영되는 곳은 아닙니다.
학교는 이제 사라지고 없습니다
2009년 12월 4일 조선 제1초급학교에서 발생한 일입니다.
점심시간에 '재일 특권을 용납하지 않는 시민 모임(이하 재특회)' 회원 11명이 모여 학교와 인접해 있는 공원을 불법 점거해서 확성기를 사용해 "(조선 제1초급학교가) 공원을 50년이나 불법 점령하고 있다. 이 학교의 토지도 불법 점거이다. 여기는 북조선의 스파이 양성기관이다. 이들은 밀입국자의 자손이다. 조선인 학교 학생들은 얼른 일본으로부터 꺼져라." 같은 헤이트 스피치(hate speech)를 1시간 반 동안 했습니다.
제1초급학교 학생들은 이 내용을 듣고 많은 정신적 충격을 받아 정상적인 학교 생활을 이어나갈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학교는 사라지고 현재 그 부지는 공터로 남아있습니다.
재특회는 2000년대 후반부터 '행동하는 보수파'라고 자칭하며 과격한 거리 선언활동 등을 전개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위안부 문제, 외국인 무연금 문제, 우토로 마을, 조선인 학교 등에 대해 지속적으로 헤이트 스피치 등의 방법을 통해서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헤이트 스피치란 인종, 민족, 성 등의 차이를 이유로 그 속성을 가진 소수자 집단 혹은 개인에게 차별, 증오, 배제 폭력 등을 휘두르고 모욕하는 표현행위입니다.
재일 조선인 마을 <우토로 마을>
재특회 같은 극우파 단체들의 반대 대상이 되는 것은 조선학교뿐만이 아닙니다. 최근 MBC 무한도전에서 방영돼, 화제가 되고 있는 우토로 마을 역시 이와 같은 혐한 행위에 대해 피해를 입고 있습니다.
저희 홀로그램 팀도 일본 답사 기간에 우토로 마을을 찾아가보았습니다. 우토로 마을은 재일 조선인 마을로, 1941년 제2차 세계대전 중 교토 군비행장 건설을 위하여 일본 정부가 조선인 노동자를 동원에서 한바(노동자가 집단으로 합숙하던 가건물)를 만들어 생활하면서 형성되었습니다.
6000평 정도의 면적에 1300여 명의 조선인이 살았던 우토로는, 사람이 살만한 공간이 아니었습니다. 조선인들이 고국을 떠나 우토로에 들어오게 된 이유는 다양합니다.
강제징용으로 일본으로 끌려왔다가 우토로로 오게 된 사람도 있고, 군대로 가는 징용을 피할 수 있다고 해서 노역을 선택한 사람도, 돈을 벌게 해주겠다는 허위 선전으로 온 사람 등 다양한 사람들이 우토로에 모이게 되었습니다.
그들에게 '고향'은 우토로 마을
1945년 일본이 패전하자 비행장 건설은 멈추게 되었고, 우토로에 있던 사람들은 하룻밤 사이에 실업자가 되었습니다.
여비가 있었던 조선인들은 일본을 빠져나갔지만, 조국에 친척도 집도 없었던 사람들은 배 표 값도 치루지 못해 고국으로 돌아갈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일본 정부와 기업은 이들의 강제 노역 피해에 대한 보상도 배려도 없이 남은 조선인들을 방치했습니다.
패전 이후 우토로 토지는 닛산 주식회사에게 넘어갔습니다. 1987년 성과가 부진했던 닛산자동차 그룹은 적자를 메우기 위해서 우토로 마을의 토지를 처분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주민들이 모르는 사이에 기업에 의해서 토지 매매 계약이 체결된 것입니다.
1989년 퇴거를 강요당한 주민들은 소송을 걸었지만 일본 재판은 원고의 손을 들어주었습니다. 이후에도 우토로 마을은 끊임없이 생존을 위해서 일본 내의 압박을 견디면서 존재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왜 이들은 일본에서 핍박을 받으면서도 조국으로 돌아가지 않고 있는 것일까요?
주민들이 우토로 마을을 떠나지 못하는데에는 각각의 이유가 있을 것 입니다. 하지만 그 중 가장 큰 이유를 꼽자면, 우토로 마을이 그들의 '고향'이기 때문입니다.
우토로의 주민들은 1900년대 초반 조선에서 건너와 일본에 터를 잡았습니다. 1세대들이 일본에 정착해 생활화면서 2세대, 그리고 3세대가 차례로 태어났고, 1세대를 제외한 2~3세대는 우토로 마을이 그들의 고향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 곳이 그들의 고향임에도 불구하고, 일본에서 재일 조선인에 대한 민족적 차별로 인해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일본인이 아니라고 입주를 거부당하거나 취업에서 배제되는 일은 종종 일어나고 있습니다. 민족 교육을 받을 권리또한 억압받고 있습니다.
최근 도쿄의 에다가와 조선학교를 없애려는 움직임은 민족교육 말살 목적을 띄고 있다는 해석이 설득력을 얻고 있습니다. UN 인권위원회는 일본 정부에게 소수자 집단인 재일 조선인에 대한 차별과 배제를 시정하도록 권고하고 있습니다.
우토로 주민들의 목소리
문광자
“우토로에 처음 왔을 당시 주위는 풀이 더부룩하고 자갈투성이인 산이었습니다. 한바에 끌려왔습니다. 판자촌 공동 합숙소는 기둥과 삼목나무로 만든 벽과 지붕이 다 였습니다. 그 날 당장 적토를 반죽해서 아궁이를 두 개 만들어서 취사장으로 했습니다. 합숙소의 방은 가족 수에 상관없이 한 가족마다 할당되었습니다. 3평 정도의 짚이 깔린 방이었습니다. 천정도 없었고 지붕을 엮은 삼목나무는 조금만 바람이 불어도 날아가버렸습니다. 밤에는 별이 보였습니다. 비가 너무 세게 오는 날이면 대야를 받쳐놓고 아기들이 비에 젖지 않도록 이리 눕히고 저리 눕히고…. 합숙소는 집이 아닙니다. 도저히 사람이 살 수 있는 집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당시 조선인은 인간으로 대접받지 못했습니다”
“왜 지금에 와서 나가라고 하는 것입니까? 우토로에 일본 사람이 반 정도만 살았었더라도 이런 짓은 못할 것입니다. 고국에서 쫓겨나와 걸레처럼 일을 시켜왔고, 전쟁이 끝난 뒤에는 방치되어 왔는데, 이제는 지금 살고 있는 토지를 빼앗으려 하고 있습니다”
박남숙
“전쟁 당시, 일본군에 들어가 목숨을 걸고 죽을 각오로 싸웠습니다. 편리할 때는 쓰다가 막상 우리가 토지에서 쫓겨나도록 되어도 일본 정부는 아무것도 해주질 않습니다. 교토부도 우지시도 아무런 상담에 응해주질 않습니다. 밤에 자고 있노라면 분노로 가슴이 떨리는 일도 있습니다. 우토로는 고향입니다. 어떻게 해서든 우토로에 남고 싶습니다”
문동기
“조선이 독립되어 ‘자 돌아가자'는 기분이었습니다. 우토로에서도 전쟁 후부터 반년 사이에 150세대 였던 것이 5, 60세대로 줄었습니다. 돌아갈려고 생각했지만 어머니가 병으로 오래 자리에 눕고 돈도 그리 간단히 준비되지 않았습니다. 얼마 안 되어 귀국한 어머니 친척에게서 일도, 먹을 것도 없다는 소식을 전해들었습니다. 그 뒤로는 우토로에 남아 먹기 위해 일만 했습니다.”
“일본을 위해 비행장을 만든 사람들이 살고 있는데도 정부나 시가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닛산자동차와 부동산회사에 한층 더 강하게 이야기 하고 싶습니다.”
출처 - http://www.kin.or.kr/utoro/sub2-2.htm
강제 징용으로 끌려와서 조국에 돌아가지도 못하고 일본에서 거주하는 것도 억울한데, 삶의 터전도 제대로 보장받지 못하는 재일코리안들이 가야 할 곳은 어디일까요?
재일 코리안들은 일본 내에서도 민족적 뿌리를 지키려고 끊임없이 노력하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자국에서는 그들의 노력을 잘 모르고 있을뿐더러 돌아오는 것도 환영하지 않습니다.
재일 코리안은 '코리안'이지만 일본에서 자랐기에, 한국에서는 '한국인'으로 인정을 받지 못하며, 그래서 겪는 불이익 또한 매우 많습니다.
홀로그램 <박주희> 팀원의 이야기
- 이번 칼럼의 원본을 쓴 팀원입니다.
저의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저는 재일 코리안은 아니지만 일본에서 태어나서 일본에서 10년간 자랐습니다. 일본이 저의 출신지였고 가장 편한 '고향'이었습니다. 하지만 10살이 되던 해 한국어를 전혀 모르는 채로 귀국하게 되었고 하루 아침에 저의 생활이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일본인 학교를 다니던 제가 곧바로 한국 초등학교를 가게 되었습니다. 그 곳에서 저는 한국인이지만 한국어를 못한다는 이유로 '일본인'이라고 여겨졌습니다.
당시의 학교 친구들은 일본이라는 나라에 대해서 매우 부정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일본인'으로 여겨졌던 저에게 '독도는 누구의 땅이니? 한국한테 왜 나쁜 짓 했어? 너네 나라로 돌아가!" 등 일본이 한국에게 저질렀던 가해 역사의 책임을 물었습니다.
전 단지 일본에서 살았을 뿐 '한국인'인데 말입니다. 잠깐 일본에서 살았던 저조차도 한국에서는 환영받지 못하는 외부인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한국내에서 '재일코리안'에 대한 인식부터 바꿔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일본인'이 아닙니다. 타국에서 힘들게 '코리아'라는 뿌리를 지켜나가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심지어 일본에 간 것 조차도 원해서 간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돕고 환영하는 것이 어찌 보면 당연합니다. 하지만 현재로써는 정부와 국민들도 그들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고 생각합니다.
저희 팀에도 재일교포 팀원이 있습니다. 그런데 초반에 저희 팀원들을 외부로 소개할 때 '베트남 팀원, 한국 팀원, 그리고 일본 팀원이 있다'라고 소개를 하곤 했습니다. 하지만 그 때마다, 재일 교포 팀원이 류유자씨는 "저는 재일교포입니다"라고 소개에 첨언을 했습니다. 처음에는 그게 그렇게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았지만, 어떤 재한 한국인 팀원은 '재일교포는 국적이 일본이 아닌가?'라는 의문부터 들었다고 합니다.
또, 팀원 구성을 표기할 때, <베트남인 재일교포, 한국인>으로 표기를 했지만, 한국인과 재일교포를 따로 적으면 재일교포는 한국 사람이 아닌 것처럼 인식될 수 있기 때문에, 한국인 대신 '재한 한국인'이라는 표현을 써서 현재 <베트남인, 재일교포, 재한 한국인>으로 표기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류유자씨에 대한 저희 팀원들의 호칭에서도 이런 구별을 볼 수 있었습니다. 한국 대학생들끼리는 처음에는 00씨라고 부르다가 친해지고 서로 나이를 알게 되면, 그에 따라 이름을 부르거나 언니, 오빠, 형, 누나와 같이 친근하게 부릅니다.
저희는 유자씨와 지난 4월부터 활동을 했고, 베트남, 일본 답사도 함께 다녀왔습니다. 우리가 재일코리안을 한국인과 같이 생각했다면, 편하게 부르는 경우 "류유자 언니/누나"라고 불렀을 것입니다. 저희도 이에 대해 인식한지 얼마 안됐지만, 저희가 유자씨를 대하는 호칭을 봤을 때, 저희 또한 재일코리안과 한국 사람을 구분하고 있었다는 점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보통 외국인 친구들 대하듯 이름만 부르고 있었습니다. 저희도 무의식적으로 한국 사람을 대하듯 대하고 있지 않았다는 점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이와 같은 경우에서도 볼 수 있듯, 재한 한국인들에게 재일 코리안의 심리적 거리는 상당히 멀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홀로그램은 우토로 마을 답사를 통해 일제강점기 이후 지속되고 있는 한-일 역사갈등의 모습을 확인했고, 소수자로서 차별받고 있는 재일 코리안들의 아픔도 느끼고 왔습니다.
또 한편 조국에서도 관심을 받지 못하고 있는 현실을 보며 앞으로 우리가 더 관심을 가지고 알려야겠다는 다짐을 했습니다.
아래는 저희 <홀로그램> 공식 페이스북 페이지입니다.
궁금하신 분들께서는 직접 방문해서 살펴봐 주시기 바랍니다.
https://www.facebook.com/hologram2015/
그리고 다음 '스토리펀딩'에서도 한동안 후원금 칼럼을 작성했었습니다.
이 쿠플존 칼럼도 이쪽에서의 내용을 바탕으로 하고 있으니
관심있는 분들은 방문해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