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에 응용된 심청의 각색
최인훈의 <달아 달아 밝은 달아>,이강백의 <심청>
심청전의 현주소
심청은 아주 다양하게 쓰이는 소재 중 하나다. 끊임없이 쏟아지는 다양한 콘텐츠들로 마침내 소재의 고갈이 도래했고, 이러한 상황 속에서 새로운 소재에 대한 갈증을 해소해준 것이 바로 옛것의 현대화다. 이의 맥락으로 옛 이야기의 각색 또한 활발하게 진행되기 시작했다. 채 20년이 되지 않은 새로운 시각의 옛것과는 다르게, ‘심청전’은 꽤 오래된 각색 역사를 가지고 있다. 예를 들어, 1920년대 중반, 박승희의 <심청전>을 시작으로 최인훈의 <달아 달아 밝은 달아>와 오태석의 <심청이는 왜 두 번 인당수에 몸을 던졌는가>와 같이 20세기의 작품을 들 수 있겠다. 또한 현대의 배경에서는 뺑덕의 시선에서 각색된 치정 멜로 영화 <마담 뺑덕>부터 춘향전과의 합의점을 찾아 둘을 혼합시킨 창작뮤지컬 <인당수 사랑가>까지 아주 다양한 범위 내에서 심청전이 각색되고 있다. 얼마 전 대학로에서 공연되었던 이강백의 <심청> 또한 마찬가지다.
최인훈이 그리는 <심청>의 눈물
우선 최인훈이 <달아 달아 밝은 달아>(이하 <달아>)에서 제시하고 있는 심청 모티프의 변주를 분석해보기 전에 원전의 내용부터 알아보기로 하자. 심청은 어려서부터 어머니를 여의고, 눈 먼 아버지 심 봉사 밑에서 자란다. 어릴 때부터 효성이 지극한 심청은 공양미 삼백 석을 시주하면 아버지가 눈을 뜰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남경 상인에게 공양미 삼백 석을 받고 자신의 몸을 팔아 인당수에 몸을 던진다. 물에 빠진 심청은 용궁에서 전생의 일과 앞으로의 운명을 전해 듣고 어머니를 만난 뒤 연꽃에 둘러싸인 채 인당수 수면 위로 떠오른다. 이때 남경 상인들이 돌아오다가 인당수에 떠 있는 연꽃을 발견하고 이를 왕에게 바치고 왕은 연꽃에서 나온 심청을 왕비로 맞아들인다. 심청은 아버지를 찾기 위해 왕에게 맹인 잔치를 열어달라고 청한다. 맹인 잔치에서 심청과 심 봉사가 만나고 딸을 만난 기쁨에 심 봉사는 두 눈을 번쩍 뜬다. 최인훈은 이러한 판타지적 내용을 철저히 거부한다.
극은 저승사자가 심 봉사의 꿈에 찾아와 심 봉사가 죽을 날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말해주는 데에서부터 시작된다. 살기 위한 욕망에 이끌린 심 봉사는 심청에게, '공양미 3백석이면 눈을 뜰 수 있다.'는 말을 살짝 흘리게 된다. 이에 심청은 뺑덕어멈의 말에 따라 공양미 3백석 마련을 위해 중국에 몸을 팔러 가게 된다. 이 때 이 매음굴의 이름이 '용궁'이다. 매춘부가 된 심청은 이후 김 서방과 사랑에 빠지게 되고, 김 서방은 돈을 모아 심청의 빚을 청산해주고, 그녀와의 결혼을 기약하고 헤어진다. 그러나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다시 해적들에게 잡힌 심청은 그들의 소굴에서 온갖 유린을 당하게 된다. 오랜 시간 이후 심청은 늙은 노인의 모습으로 고향에 돌아와 바닷가에 앉아 있다. 아이들에게 옛날 제 이야기를 들려줄 때에, 심청은 마치 무용담을 얘기하듯 부풀리고 한껏 과장해 이야기하지만 아이들은 믿지 않는다. 오히려 '청청 미친 청, 청청 늙은 청'이라고 놀리고 조롱할 뿐이다. 심청도 아이들이 제 말을 믿어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결말에서 심청은 아이들의 '달아 달아 밝은 달아' 노래를 들으며 김 서방에게 다음을 기약하는 징표로 받았던 거울을 들여다본다. 그리고 심청은 교태를 지으며 환하게 웃어 보이고, 이로써 극은 마무리된다.
최인훈이 강조했던 동시대성은 그만의 각색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그는 한 인터뷰에서 심청을 창녀로 설정한 것에 대해 “딸이 등 떠밀려 제물이 된다는 것이 민족의 아름다운 유물로 생각되지 않았다. 자신의 결정에 따라 집안을 위해 몸을 파는 것이 오늘날에 비춰서도 오히려 현실적이지 않느냐.”고 반문한 뒤 초연 당시 부정적인 반응에 대해 “전위·현대 연극에서 그 정도는 농담 수준이다. (그걸 이해 못하는) 촌뜨기들이랑 무슨 얘길 하겠어.” 라고 담담하게 말했다.
7-80년대에는, 급속 성장과 함께 경제적 격차가 벌어지기 시작한 시기로 정리된다. 특정 지역에서의 빠르고 안정적으로 돈을 벌어들일 수 있는 산업을 국가 중점 사업으로 지정하면서, 소외 계층이 발생하기 시작한 것이다. 국가는 뒤쳐진 사람들을 미처 돌볼 틈도 없이 거대하게 성장해나가는 기업들을 챙겨야 했고, 이에 뒤쳐진 사람들은 빈부격차의 산물로 남아 거리를 전전해야 했다. 또한 이 때 일제강점기 때의 부정적 산물이었던 유곽에서부터 미군 상대 기지촌이 생겨나기 시작했고, 이는 ‘집창촌’이 성행하기 시작했다. 이로서 홍등가, 즉 빨간 불빛이 난무하는 거리 아래 나신, 혹은 거의 발가벗은 여자들이 인형 같이 즐비한 사창가가 익숙해지기 시작한 것이다. 특히 박정희 정부 하에서 적극적으로 육성된 ‘몽키 하우스’는 우리나라 근대사의 아픔으로 남겨지고 있다. 여성들로 하여금 달러를 벌게 하는 행위 자체가 우리나라 경제 성장에 이바지하게끔 했던 도구로 취급된 것이나 다름이 없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수많은 여성성이 훼손당했고, 어쩌면 지금까지도 그에 대한 고통을 받아오고 있는 실정이다.
최인훈의 <달아>는 이 두 가지 사회의 이면에서 출발한다. 빈곤 가정인데다가 장애인으로 살아가는 빈곤 가정의 상징으로서 심 봉사, 그리고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을 찾지 못하고 결국 여성을 팔게 되는 심청은 7-80년대 최인훈의 극작 당시 소외 계층의 실태를 아주 생생하게 보여주는 캐릭터들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뱃사람들을 소개시켜주면서 돈을 벌 수 있는 방법은 매춘 밖에 없다는 듯이 귓속말을 하는 뺑덕어멈 또한 한 여자 아이의 안위와 그녀에 대한 측은지심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듯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 또한 하나뿐인 딸의 안위보다 눈을 뜨는 것을 더 중요시 여기는 심 봉사는 이기심과 헛된 욕망으로 점철된 인물로 등장하고 있다. 이는 심청을 더욱 비극적인 인물로 그려내게끔 만든다. 이는 소외 계층에서의 인간성 상실과 ‘돈’을 벌고 싶은 욕망이 자식에 대한 사랑이라는 본능을 앞서는 자본주의의 폐해를 말하는 듯하다.
앞서 언급한 ‘몽키 하우스’는, 박정희 정부 대에 만들어져 2000년대까지 사라지지 않고 계속되었다. ‘몽키 하우스’에서 고통 받던 기지촌의 여성들은 성병이 아님에도 고통스러운 성병 주사를 맞아야 했고, 의사들에게 여성으로서 수치를 당해야 했으며, 심지어 페니실린 부작용으로 사망하기도 했다. 중요한 것은 미군들의 ‘기지촌 여성들이니 성병에 걸릴까 무섭다.’는 불만 때문에 여성들이 강제적으로 몽키 하우스로 끌려갔다는 점이다. 여성들, 정부의 급속 발전 부산물로 가난에서 피하지 못하고 여성을 팔아야 했던 어린 7-80년대의 심청들의 참혹한 실상이었던 것이다. 정부는 그들을 구해주지 않았고, 오히려 달러벌이에 혁혁한 공을 세운다며 표창장까지 쥐어주었다. 가난에서도 구제해주지 않았고, 처참하게 짓밟히고 있는 여성성을 방관했고, 오히려 독려하기까지 한 것이다.
심청은 김 서방이라는 존재를 만나 빚도 청산할 뿐만 아니라 다음을 기약하기까지 하지만, 그녀에게 다음은 없다. 매음굴에서 빠져 나오자마자 해적에게 잡혀, 해적에게까지도 유린을 당하고 만다. 빠져나오고 싶어도 빠져나올 수 없는 것이다. 심청은 청춘을 모두 매음굴과 해적단에서 소비하고, 노인이 되어서야 고향 땅을 밟는다. 그러나 그녀에게 고향 또한 휴식처가 되지 못한다. 그녀의 이야기를 믿어주려고 하는 사람은 없고, 오히려 조롱당한다. 이는 심청의 캐릭터에서 비극성을 심화시키면서, 자연스레 사창가 여성들의 삶을 보여준다. 빠져나오려고 할수록 더 심하게 구렁텅이 속으로 빨려드는 그곳의 삶, 그리고 사창가 여성들의 변은 들어주지도 않은 채 여성을 팔았다며 비난하는 사람들. 어디에도 7-80년대 심청들이 쉴 공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마지막 결말 부분에서 거울을 들여다보며 미소를 짓는 심청은 이 모든 비통하고 참담한 상황을 함축해 보여준다. 최인훈은 이러한 동시대적 비극성을 극중에서 가감 없이 드러내고 있다.
이강백이 그리는 심청의 죽음
이강백의 작품 ‘심청’에서 선주는 일평생 9척 상선으로 중국과 무역을 해오며 해마다 어린 처녀들을 제물로 바쳤다. 주인공 간난은 겉보리 스무 가마에 팔려온 마지막 제물로 절대로 바다에 빠져 죽지 않겠다고 버틴다. 선주는 수많은 심청이들의 죽음과 간난의 죽음, 그리고 얼마ㅊ남지 않은 자신의 죽음까지 받아들이면서 간난을 통해 삶에 대한 욕망과 의지를 새롭게 발견한다. 간난 역시 인당수의 제물로 팔려온 자신의 삶과 처지를 되돌아보며 하루를 살아도 간난이로 살고자 한다. 선주는 죽음을 마주하며 간난의 삶의 보았고, 간난은 자신의 비루한 삶을 인식하며 죽음의 두려움에서 벗어난다. 선주와 간난은 서로의 상황을 통해 타인에 대한 인식과 이해를 향해 나아간다. 그리고 선주는 죽음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며 간난의 삶이 온전할 수 있게 도와주려 한다. 간난은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나며 딸을 판 원망스러운 아버지도 용서한다. 두 사람은 서로의 모습을 통해 인간이 어떻게 죽어야 하는지 깨닫는다.
모두에게 죽음은 아주 당연한 것이다. 어쩌면 살아간다는 말은 죽어간다는 말의 이음동의어일지도 모른다. 또한 죽음만큼 공평한 것은 없다. 부유하게 살아가든, 가난하게 살아가든 죽음은 아주 동일하게 찾아온다. 부유하게 산다고 해서 조금 더 오래 살지도 않고, 가난하게 산다고 해서 조금 더 빨리 죽지도 않는다. 언제 찾아올지 모르는 죽음은 그렇기에 삶을 살아내는 우리에게 무섭고 버거운 것일지도 모른다.
이강백은 이러한 죽음이라는 소재를 심청전에서 끌어온다. 인당수 앞에 선 심청의 심정은 어땠을까, 그리고 인당수에 심청을 빠뜨리던 선주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라는 두 가지의 질문에서 이 극은 시작된다. 몇 번째인지 모르지만, 선주의 삶에 있어 마지막 마마가 될 간난은 처음에 죽음을 거부한다. 그저 인당수에 빠져들어 허무하게 숨이 막혀 죽는 것에 두려움을 느끼는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그녀는 선주의 집에서 죽음을 받아들인다. 어쩌면 선주가 아니었다면 제 평생 누려보지 못했을 호사를 며칠 동안이나 누렸고, 제 신분으로는 감히 쳐다볼 수 없는 자리인 왕비의 자리를 간접적으로 경험해보기도 한다. 어쩌면 이것으로 간난은 되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어쩌면 이것이 모든 것을 누렸고, 다른 이들이 일생에 누릴 수 있는 호사를 보름 내에 모두 겪었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죽음을 인정하면서 간난은 가난과 아버지의 학대로 고통 받던 삶을 되돌아보게 되었고, 진정으로 아버지와 선주를 용서하게 된다. 이렇게 죽으면 어떠하리, 저렇게 죽으면 어떠하리, 라는 마음으로 간난은 뱃노래와 함께 사라진다.
반면 선주는 죽음이 다가온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고 있었으며, 어쩌면 극 초반의 간난과는 다르게 처음에는 그 죽음을 인정하는 편이었다. 그렇기에 간난에게 당신이 제 마지막 마마가 될 것이라고 담담하게 말하기도 했다. 또한 수많은 심청들의 죽음을 당연하게 받아들였고, 그것이 그들의 운명이라고 여기기도 했다. 그렇기에 <심청전>을 써내, 그것을 효의 이야기로 둔갑시키고, 그것으로 더욱 많은 재물을 축적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제 막 꽃을 피울 나이인 간난의 생의 의지를 보면서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죽음에 대해 진지하게 고찰하게 된다. 또한 죽음이 마냥 당연한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그는 며칠간이지만 진정한 삶의 의지를 가지게 된다. 어쩌면 간난과 도란도란 살아가고 싶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에게 시시각각 다가오는 죽음의 그림자를 느끼고, 간난에게만 죽음에서 도망칠 기회를 준다. 그러나 간난은 피하지 않는다. 오히려 도망쳐서 살아봤자 뭐하겠느냐, 이만하면 됐다는 태도로 죽음을 의연하게 받아들인다. 이후의 생에 대해 한 치의 의심과 두려움 같은 것은 없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까지도 버리기 위해 노력한다. 이를 보며 선주는 너무 늦게 깨달아버린 생의 기쁨과 의지에 대해 한탄하며, 간난과 같이 죽음에 대해 담담해지도록 노력한다. 그리고 그는 죽음의 순간에 웃고 있기를 바란다. 그러나 그는 그러지 못했다. 다가오는 죽음의 그림자에 잡혀 먹히면서, 그는 자신이 바라왔던 대로 죽지 못한다. 그렇다고 해서 이강백의 <심청>이 인과응보를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나쁜 짓을 했으니 응당 그렇게 죽어야 된다는 것보다, 그들이 죽음을 받아들이고 바로 코앞까지 직면한 상황에서 대처하는 장면으로 오히려 관객으로 하여금 생의 의지를 불러일으킨다. 죽어가는 선주를 지켜보며 관객들은 역설적으로 ‘열심히 살아야겠다.’라는 생각과 함께 ‘나의 죽음은 어떠할 것인가.’에 대해 진정으로 고찰하게 된다. 또한 선주와 간난이 죽음을 받아들이는 태도가 극 초반에서 마무리까지 정반대로 진행되다가 결말에서 합쳐지는데, 이것이 오히려 삶의 소중함과 기쁨을 불러일으킨다. 이는 작가의 절제된 대사들과 필력에서 나오는 관객에게의 담대한 선물일 것이다.
최인훈과 이강백의 심청으로 보는 각색의 올바른 방향 제시
심청은 어쩌면 닳고 닳은 소재라고 말할 수 있다. 너무 많이 사용되기도 했고, 이리저리 해체되어 창작자들의 입맛에 맞게 재단되기도 했다. 이제 <심청>이라고 하면, 관객들은 쉽게 지루함을 느끼는 데까지 도달했다. 이강백의 <심청>을 연출한 이수인 연출가 또한 이에 대해 고민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러한 소재의 과잉 사용 속에서 결국 빛을 발하는 것은 각색 및 창작의 힘이라고 할 수 있다.
각색은 늘 창작자들에게 쉬우면서도 어려운 작업이다. 최인훈과 이강백의 <심청전> 각색은 이러한 고충에서 벗어날 수 있을 방안을 제시해준다. 사회를 바라보는 동시대적 시선과 전혀 다른 소재와의 만남, 그리고 작가의 자서전적 이야기. 각색을 하고 싶은 창작자들에게 최인훈과 이강백의 <심청전> 각색은 올바른 표상을 보여주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