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화에 쓰인 사진들은 전부 <홀로그램>팀이 직접 촬영한 것으로
저작권은 <홀로그램>에게 있습니다.
1. 선미학살박물관을 방문하다
저희팀이 베트남 답사를 가면서 여러 곳을 방문했는데,
그 중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곳 한 곳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이곳은 사진에도 쓰여있듯이,
선미학살박물관(Museum of Sonmy Massacre)입니다.
이 곳은 베트남 중부지방 꽝응아이(Quang Ngai)성 꽝응아이시 띤케(Tinh khe)읍
뜨꿍(Tu Cung)마을에 있습니다.
박물관은 ‘미라이(My Lai)' 학살’로 알려진 사건의
여러 증거를 전시하고 있습니다.
미라이 학살에 대해서 잠깐만 설명하고 지나가겠습니다.
미라이 학살( - 虐殺, 베트남어: thảm sát Mỹ Lai)은
베트남 전쟁 중인 1968년 3월 16일 남베트남 미라이에서 발생한 미군에 의해 벌어진 민간인 대량 학살이다.
347명에서 504명으로 추정되는 희생자는 모두 비무장 민간인이었으며 상당수는 여성과 아동이었다.
더욱이 몇몇 희생자는 성폭력이나 고문을 당하기도 하였으며 시체 중 일부는 절단된 채 발견되었다.
[1] 이 사건에는 미군 26명이 가담하였으나 입대한 지 4개월 2주밖에 되지 않은 윌리엄 켈리[2] 중위만이 유죄 판결을 받았다.
-위키피디아-
미라이 학살은
한 용감한 미국참전군인에 의해서 폭로된 사건이었습니다.
이는 그 당시에 베트남전에 주목하고 있던 미국과 세계의 많은사람들을 경악시켰으며
이후 반전운동에 불을 지피게 됩니다.
이 박물관에서 볼 수 있는 많은 사진들은 대부분이 미군과 같이 동행하던
종군기자들에 의해서 촬영된 사진들이었습니다.
모두가 이용하는 커뮤니티 사이트라서 민감한 사진을 올리지 못하지만,
위키피디아에서 ‘미라이학살’이라고 검색하시면, 그곳에 많은 사진들이 첨부되어있습니다.
총을 맞고 죽은 시체들의 적나라한 사진들을 볼 수 있는데
이는 모두 박물관에서 볼 수 있는 사진입니다.
개인적의 소감으로는, 선미학살박물관은 제가 여태 다녀본 박물관 중
가장 무겁고 끔찍한 사실을 전시하고 있는 박물관이었습니다.
2. 불의에 저항한 사람들
앞서 미라이학살 사건을 폭로한 한 미국인이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 미국인이 바로 이 사람입니다.
이름은 로날드 리덴하우어(Ronald Ridenhour)이고
1967~1968년부터 꽝응아이에 주둔했던 미군이었습니다.
부록설명 원문
Mr. Ronald Ridenhour, a U.S soldier who has lived in Quang Ngai(1967-1968, was the first to publish the massacre)
로날드가 사건을 폭로한 공헌자 였다면,
사진에 있는 휴 톰슨(Hugh Thompson)은
사건의 전말을 밝히는 증인으로 나섰습니다.
그는 학살현장에서 몇 몇의 민간인을 살리기도 했습니다.
원문
Hugh Thompson - a helicopter pilot who bravely saved some civilians in the terrible massacre.
Later he is one of eye_witnesses who contributed to publish the U.S soldiers' crime at Son My
마지막으로
로렌스 콜번(Lawrence Colburn)
헬기 사수였으며, 조종사였던 휴 톰슨과 함께 Thuan Yen과 Tu Cung 마을에서
진행 중이던 미군의 학살을 막았습니다.
원문
Lawrence Colburn - Helicopter gunner,
he and Hugh Thompson(a helicopter pilot) stopped U.S soldier's killing at Thuan Yen sub-hamlet, Tu Cung Hamlet
역사에 기록되지 못할 뻔 했던 이 사건을 세상 밖으로 끌어낸 것은
바로 불의에 저항하고자 했던, 위 세 명과 같은 인물들 덕분이었습니다.
사실 베트남 전쟁은
남베트남 해방전선(흔히 ‘베트콩’이라 불리우는)들이
민간인 사이에 숨어서, 언제 어디서 공격할지 모르는 게릴라 전술을 사용했기 때문에
당시 참전했던 군인들은 민간인과 적군을 구분하기 쉽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런 혼란이
언제 자신에게 총구를 돌리지 않을까 하는 민간인에 대한 극심한 공포를 유발하고
그 공포를 해소하기 위해 남녀노소 할 것 없이 학살을 했다는 것이
주된 견해입니다.
허나, 이러한 이유가 사건의 원인에 대한 고려는 될 수 있어도
민간인 학살에 대한 면죄부가 될 순 없습니다.
현재 우리나라 참전군인단체에서는 위와 같은 논리를 통해
학살이 발생한 지역에서 끊임없이 제기되는
한국군 민간인 학살에 대해서 부정하고 있으며,
이는 위 미라이 학살사건과 큰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3. 박물관 견학을 마치고
위 사진은 박물관 부지내에 있는 석상입니다.
학살 피해와 그것을 이겨내고자 하는 모습을 형상화 했다고 여겨지는데,
그 밑에 향을 피우는 곳이 있었습니다.
저를 비롯한 홀로그램 팀원들은 희생자들의 넋을 위로하고자 향을 피워
향불을 손에 모으고 세 번 인사하는 베트남식 참배를 했습니다.
베트남 전쟁이 좌우 이데올로기 전쟁이었는지, 제국주의 해방전쟁(베트남 입장에서)이었는지,
희생자들이 베트콩이었는지, 아니면 민간이었는지에 대한 생각은 접어두고
잠시동안
전쟁으로 인해 목숨을 잃었던 사람들, 그로 인해 가족을 잃어야 했던
사람들을 생각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부록 - 한국 관련 사진
제가 지금 고화질 사진을 쓸 수 가 없어서
영상을 캡쳐한 사진으로 대신 보여드리겠습니다.
해당 사진은 박물관에 있는, 한국과 관련된 딱 한 장의 사진입니다.
잘 보이지 않으시겠지만,
팔에 호랑이 마크가 있는 걸로 보아서 맹호부대 대원들로 보이고
M1 개런드 소총을 소지한 것으로 보아, 베트남 파병 초기 사진으로 생각됩니다.
저희가 그 동안 공부해오던
한국군 관련 학살사건에 대한 실마리를 얻을 수 있을까 생각도 했었지만
미라이 학살 사건은 한국군과 상관없는 일이었기 때문에
이 사진을 제외하고 관련 사진은 없었습니다.
참고로 사진 밑의 부연설명으로
'한국 용병'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습니다.
현 베트남은 한국군이 당시 남베트남의 동맹군으로서가 아닌
미군의 고용으로 전쟁에 참여한 용병으로 인식하고 있는 거죠.
이에 대한 논란은 차후 칼럼에서 다룰 예정입니다.
그럼 이번화는 이것으로 마치고
다음화에선 한국군 민간인학살과 관련된
빈호아 마을 탐방기에 대해서 이야기 하겠습니다.
P. S - 이번 칼럼을 쓰면서 동영상도 많이 올릴려고 했는데,
다음 스토리펀딩쪽에 있는 동영상이 무슨 이유인지 모르겠지만 안퍼가지더라구요.
https://storyfunding.daum.net/episode/1488#none
이곳에 들어가시면 이번화와 관련된 여러 동영상 보실 수 있습니다.
참고해주세요~!
아래는 저희 <홀로그램> 공식 페이스북 페이지입니다.
궁금하신 분들께서는 직접 방문해서 살펴봐 주시기 바랍니다.
https://www.facebook.com/hologram2015/
그리고 다음 '스토리펀딩'에서도 한동안 후원금 칼럼을 작성했었습니다.
이 쿠플존 칼럼도 이쪽에서의 내용을 바탕으로 하고 있으니
관심있는 분들은 방문해주시기 바랍니다.
https://storyfunding.daum.net/project/2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