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고려대학교 110주년 개교기념 축사
오늘 우리는 고려대학교 개교 110주년을 맞는 역사적 현장에 서 있습니다. 고려대학교의 전신 보성전문학교는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으로 나라의 운명이 꺼져가는 등불과 같던 1905년에 최초의 민족 사학으로 첫발을 내디뎠습니다. 망국의 한을 품고 좌절하기 보다는 뒤늦은 근대화의 물결을 헤쳐나가기 위해 불굴의 정신으로 인재양성이라는 씨앗을 뿌린 것입니다. 이처럼 ‘교육구국’의 건학이념으로 출범한 고려대학교는 민족의 대학으로서 강한 사명의식을 갖고 우리나라 최고의 사학으로 110년의 역사를 지켜왔습니다.
지난 110년 좌절도 있었고 시련도 있었습니다. 암울한 일제강점기에 민족정신을 고양시키며 해방의 날을 기다리는 인고의 시간도 있었습니다. 독재와 부정선거에 항거하여 4.18의거로 4.19 학생혁명을 이끌어낼 때 많은 희생을 감내했습니다. 군사독재체제에서 자유와 정의를 지키기 위해 저항하다가 위수령과 긴급조치로 휴교사태를 맞았습니다. 6월 민주화항쟁으로 정치 민주화를 이루기까지 폭압에 항거하며 오랜 인고와 고난의 시간을 견디어 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지난 110년 호랑이의 기개로 우리 사회를 지켜온 고려대학교는 민족의 보람이요, 겨레의 희망이었습니다. 진리 탐구로 우리나라 지식사회를 이끌어 왔고, 실천적 지성으로 산업화를 추구하여 우리나라를 경제선진국으로 도약시켰습니다. 고려대학교는 자유, 정의, 진리의 교훈으로 무장된 인재를 배출하여 우리 민족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습니다. 이제는 세계적 대학평가기관이 고려대학교를 주요 학문분야에서 세계 100대 대학으로 평가하고 있습니다. 전 세계에서 다양한 방면에서 활약하는 고대 교우들도 글로벌 KU, 고려대학교의 명성을 드높이고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 우리 대학의 현주소는 그리 밝지 않습니다. 과거와 같이 대학이 시대를 이끄는 지성으로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대학은 영혼 없는 수월성을 지향하며 무한경쟁의 사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연구의 양적 팽창은 질적 우수성을 오히려 저해하고 있습니다. 교육에 있어서도 형식지의 일방적인 전수는 21세기가 필요로 하는 암묵지의 체득을 방해하고 있습니다. 획일적인 외부평가와 다양한 규제는 대학의 자율성과 창의성을 심각하게 침해하고 있습니다.
대학구성원 모두가 교육 현실에 대한 반성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것이 오늘의 현실입니다. 공공선을 앞세우는 전인격적 지성을 배출하기 보다는 사적 이익을 앞세우는 기능적 지식인만을 배출해 왔음을 고백할 수밖에 없습니다. 대학이 우리 사회의 미래를 책임질 지도자를 배출하는 고등교육기관으로서의 진정한 사명을 다했다고 자신 있게 말하기 어렵습니다. 이제 경쟁과 갈등, 불안과 좌절, 절망과 분노로 점철된 이 시대에 대학의 사명을 진지하게 고민해보아야 합니다. 인촌선생의 공선사후의 정신이 빛을 잃어가고 있는 이 때에 고려대학교의 교육적 사명을 다시 한 번 되새겨야 합니다.
110년을 넘어 우리 고려대학교가 새로운 미래를 열고자 합니다. 새롭게 미래를 이끌고 새로운 역사를 써 나가고자 합니다. 110년 전 ‘교육구국’ 의 사명을 주창했던 근대화의 선구자들처럼 21세기를 개척해야 하는 민족적 소명의식을 갖고 새 시대를 열어야 하는 시대적 사명을 우리는 짊어져야 합니다.
오늘 문명사적 대전환기에 직면해 절망하고 있는 청년들에게 고려대학교가 미래의 꿈과 희망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패러다임의 변화를 선도하고 미래의 길을 제시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 우리는 뼈를 깎는 변화와 혁신을 추진해야 합니다. 변화는 안주하는 사람에게는 공포와 재앙이지만, 개척하는 사람에게는 기회와 축복입니다. 고려대학교가 끝없는 혁신으로 ‘개척하는 지성’을 키워내 우리나라의 미래를 밝힐 수 있기를 꿈꾸어 봅니다.
고려대학교의 자긍심은 과거의 성취와 영광에 있는 것이 아니라 미래에 대한 도전과 투자에 있습니다. 110주년을 넘어 새롭게 태어나는 고려대학교를 통해 우리는 고대의 자긍심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겨레의 보람인 고려대학교의 앞날에 영광과 희망이 가득하도록 우리 모두 함께 나아갑시다.
감사합니다.
2015년 5월 5일
고려대학교 총장 염재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