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홀로그램의 제갈준입니다.
이제 드디어 올해 마지막 달12월에 접어들었습니다.
날씨가 많이 추운데 감기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곧 있으면 기말시험이군요 ㅠㅠ
준비잘하셔서 좋은 결과 얻으시길 바라겠습니다 ^~^
자 그럼 오늘 칼럼 시작하겠습니다.
1. 빈호아를 방문하다
저희가 방문한 마을들은 베트남 중부지역 꽝응아이 성 빈호아(Bình Hòa)에 있습니다.
이곳은 '빈호아 학살'로도 알려졌는데요.
현재 많은 논란을 일으키고 있는 사건 중 하나입니다.
위키피디아에도 등재되어있는데, 근거로 쓰인 주석에 대한 진위여부가
이렇다 저렇다 말이 많은 실정입니다.
그래서 지금부터 저는 인터넷에 퍼져있는 자료라든가
각종 참고서적에 나오는 내용이 아닌,
홀로그램팀이 방문해서 보고 들은 것을 위주로 이야기 하려합니다.
이 마을들은 보통 우리가 베트남을 방문했을때 들리는 도시와 많이 다른 곳 입니다.
우리나라의 시골동네라 생각하시면 될 거 같네요.
외진 곳이다 보니, 외국인들은 찾아볼 수 도 없고
현지 주민들만 거주하는 곳 입니다.
이 지역은 '빈호아 학살' 사건으로 인해
많은 외지 사람들(특히 한국인)이 왔다갔었고,
초기엔 현지 주민들이 방문하는 한국인들에게 많은 적대감을 나타냈다고 합니다.
이렇게 민감한 지역이다보니, 원래 이곳에 방문하기 위해서는
베트남 지방정부에 정식으로 요청을 해서 허가를 받고
파견된 공안과 함께 들어가야 하는 곳입니다.
물론 그 사람은 저희가 무얼하는지, 마을사람들과 무슨이야기를 하는지
다 감시하러 온거겠죠...;;
그리고 그렇게 들어간다음, 마을사람들과 이야기하면
다 똑같은 이야기 밖에 안한다고 합니다.
"과거에 불미스러운 일이 있었으나, 앞으로 미래를 향해 같이 나아가자"
현 베트남 정부의 정책방향과 일치하는 부분이죠.
그래서 처음 방문한다면 주민들에게 진솔한 이야기를 듣기는 어렵습니다.
이와같은 이유로, 처음에 저희는 이곳을 방문할 수 있으리라고는 전혀 기대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저희 팀원 중 베트남 유학생이 있었고, 렌트카를 빌려서 이동하느라 현지 운전기사님도
저희와 계속 같이 다니셨기에, 어떻게 어떻게 방문할 수 있었습니다.
(베트남 국민이 빈호아에 방문하는 것은 아무런 제재가 없습니다)
그렇게 저희는 마을안으로 들어왔는데, 마을풍경은 한국의 시골과 별반 다르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마을 현지주민들은 저희를 신기하게 쳐다봤죠.
하긴 시골마을에 왠 젊은 외국인들이 차를 타고 단체로 방문했으니
호기심이 많이 생겼을 겁니다.
현지 운전기사님은 지나가면서 주민들이 놀라지않게
저희가 베트남에 역사공부하러온 유학생들이라는 소개를 해주시고
한국군 증오비가 있는 곳으로 안내해주셨습니다.
아 참
원래 운전기사님은 운전만 해주시기로 하신거였는데,
저희가 계속 어디를 들려서 내렸다 하니
무엇때문에 이리 돌아다니냐고 물어보셨습니다.
그래서 저희는 활동에 대해서 베트남 팀원을 통해 이야기 해드렸고,
마침 기사님도 한국군 증오비와 빈호아에 대해서 알고 계셨기에
방문하는 것을 도와주시겠다고 하신거였습니다.
2. 한국군 증오비
기사님이 안내해주신 곳은 어느 집 앞마당에 있는 비석이었습니다.
비석이 집앞에 너무도 가까이 붙어있었기 때문에, 집주인 할아버지께 허락을 맡아야 했었습니다.
왜냐면 저 비석에 빼곡히 적혀있는 희생자 명단에
그 집주인 할아버지 가족들도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비석 번역은 베트남 팀원이 직접했습니다.
남조선이라는 말에 조금 의아하실 겁니다.
비석에 NAM TRIEU TIEN(베트남어를 쓸수가 없어서 성조를 뺐습니다)
이라고 쓰인 것이 남조선이라는 단어입니다.
베트남어는 같은 한자권 문화이기에 한자를 바탕으로 둔 단어는 발음이 꽤 비슷합니다.
남조선이라는 말을 쓴 이유는, 베트남이 한국과 수교하기 전까지는 한국을 남조선이라고 불렀기 때문이죠.
다시 집주인 할아버지의 이야기로 돌아가면
할아버지는 저때 당시 한국군 학살로 인해 아내와 손주를 잃으셨다고 하셨습니다.
학살 이후에도 잃어버린 가족을 매일 아침 집 앞에 세워진 비석을 보면서
마음에 다시 묻어두어야만 하는 할아버지의 이야기는 무척 마음이 아팠습니다.
또 다른 위령비가 있다는 인근 DOC RUNG 마을을 찾았습니다.
(빈호아는 꽤 넓은 지역이기에, 이때 방문한 곳은 모두 빈호아 지역에 속한 마을이었습니다)
이곳에서 만난 할아버지는 오히려 한국을 조금은 이해한다고 하셨습니다.
한국은 그 당시 오랜 식민지 시기를 벗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전쟁을 치뤘고,
그래서 가난했기에 미국이 지원을 해준다고 하니 이곳에 온 것이 아니겠냐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덧붙여, 베트남 사람은 한국 사람들을 이해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마지막으로 구글에서 증오비를 검색하시면 많이 보실 수 있는
빈호아 증오비를 방문했습니다.
저는 이 증오비에 대해선 활동을 하기 몇년전부터 알고 있었는지라
제 눈으로 직접 보았을때 인상을 깊게 받았습니다.
크기도 생각보다 크지 않았구요.
이 비석역시 사람들이 많이 지나다니는 곳에 세워졌습니다.
그곳에 사는 사람들은 이 비석을 일상생활에서 많이 봤겠지요.
이 비석은 구글에 '한국군 증오비'에 대해서 검색해보면
많은 연관 기사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비석중에는 하미 위령비와 함께 제일 유명한 비석이 아닐까 합니다.
하미위령비도 방문했었지만, 빈호아 지역이 아니었기 때문에
따로 나중에 언급할까 합니다.
3.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할 문제
베트남 사람들 중에서는 이러한 사건들을 현재의 경제적 발전과 협력을 위해서
일단은 과거를 덮고 미래를 생각하자고 공식적인 입장을 표명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는 마치 경제개발을 위해서 과거를 일단 뒤로하고 일본과 한일협정을 성사시킨
과거 우리정부와 매우 비슷한 양상입니다.
그 당시 우리 정부나 현 베트남 정부도
'당장 먹고살기 힘든 상황에 과거사를 가지고 발목을 잡을 순 없다'
라고 생각한 것이 겠죠.
하지만 우리나라는 그로 인해서
일제시기로 인한 피해사례, 즉 강제징용 및 위안부 문제 등 등이 제대로 마무리되지 못하고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위안부 관련 문제는 92년도가 되어서야 일본대사관 앞에서 이뤄지는 '수요집회'를 통해
한국 사회에 본격적으로 대두되었고
1996년 고등학교 국사교과서 (하)권에 이르서야 첫 언급이 되기 시작하죠.
베트남 피해자들도 이와 비슷한 실정입니다.
현 베트남 정부가 지향하는 정책과 대립이 되니, 제대로 된 목소리가 나올 수 없는거죠.
현 베트남 교과서에는 한국군의 베트남전 참전 서술조차 나와있지 않습니다.
(베트남 팀원이 가져온 국정역사교과서에서 확인해본 바로는)
하지만 그들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다고 해서, 그들의 전쟁으로 인한 아픔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지요.
지난 4월에 베트남에서 한국군에 의해 가족을 잃고 총탄을 맞았던 피해자 2명이
이에 대해 이야기하기 위해서 한국에 방문했습니다.
그러나 간담회가 열린 장소 앞에서는 우리나라 참전군인 단체 할아버지들이
군복을 입고 그들을 양민행세하는 베트콩이라 칭하며 시위했었죠.
이와같은 상황을 보면서, 저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이 문제에 좀 더 많은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나라와 일본의 역사갈등사례와 비슷하게
이 문제는 미래 한국과 베트남 관계에 악영향을 미칠 수 있는 갈등의 씨앗이기 때문이죠.
이것으로 오늘 칼럼을 마치겠습니다.
그리고 다음주는 시험기간이기 때문에 한 주 쉬고, 그 다음주에 뵙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아래는 저희 <홀로그램> 공식 페이스북 페이지입니다.
궁금하신 분들께서는 직접 방문해서 살펴봐 주시기 바랍니다.
https://www.facebook.com/hologram2015/
그리고 다음 '스토리펀딩'에서도 한동안 후원금 칼럼을 작성했었습니다.
이 쿠플존 칼럼도 이쪽에서의 내용을 바탕으로 하고 있으니
관심있는 분들은 방문해주시기 바랍니다.
https://storyfunding.daum.net/project/2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