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9월 14일 밤 KBS 2TV의 '다큐멘터리 3일'(이하 '다큐 3일')에서는 '9회말 투아웃'이라는 제목으로 한화 이글스 선수단과 팬들의 72시간을 다룬 적이 있습니다. 다들 아시겠지만 한화 이글스는 한국의 프로야구 구단입니다. 1986년 '빙그레 이글스'라는 이름으로 창단한 이래로 80년대 말부터 90년대 중반까지 나름대로 좋은 성적을 유지해왔고 1999년 시즌에는 첫 우승까지 거머쥐었지만, 2008년 시즌 이후로 이글스는 깊은 부진의 늪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심지어 2013년 시즌에는 팀의 기둥이나 마찬가지였던 류현진 선수마저 메이저리그로 진출하면서, 13연패라는 불명예와 함께 9개 구단 체제 최초의 꼴찌가 되었는데요. 2014년이 되어서도 뭔가 제대로 풀리지 않는 것인지 좀처럼 9위를 벗어나질 못하고 있습니다. "이러다가 (KT 위즈의 합류로) 10개 구단 체제가 되어서도 최초의 10위를 차지하는 것은 아니냐"는 한숨 섞인 말도 나오고, 한화 이글스의 '나는 행복합니다'라는 응원가는 타팀 팬들에 의해서 조롱의 의미로 쓰이기까지 하는 것이 현재 이글스가 처해있는 상황입니다. 야구를 잘 모르는 사람조차도 한화 이글스의 팬이라고 하면 측은한 눈길을 보낼 것만 같습니다.
그런데, 정작 다큐 3일에 나온 팬들과 선수들의 모습은 제가 생각하는 것과는 사뭇 달랐습니다. 우선 이글스의 선수들은 경기장에서 뛴다는 것 자체를 매우 소중한 기회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실제로 고등학교 야구부에서 매년 700명 정도의 졸업생이 배출된다고 합니다. 그 중에서 프로야구 구단이 영입하는 것은 각 구단 당 약 8명 정도입니다. 전체 구단이 9개 정도이니 80명도 채 안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가까스로 프로야구 선수가 된다고 하더라도 한 구단에서 1군과 2군, 재활 선수까지 다 합쳐서 90여 명의 선수 중 경기에 나올 수 있는 것은 26명에 불과합니다.
어찌어찌 26명 안에 들었다고 칩시다. 그래도 여전히 문제는 남아있습니다. 구위가 좋지 않아서 강판되거나 부상을 당하는 등 여러가지 변수로 인해서 경기에서 오래 뛰지 못하게 되는 경우가 흔하기 때문입니다. "그냥 후회 없이 던지고 마운드에서 내려오고 싶다"는 정대훈 선수의 말은 그래서 저에게 더욱 간절하고 절절하게 느껴졌습니다. 마운드에 서기까지 숨겨져 보이지 않는 몇 년간의 노력과 고통을 생각한다면 마운드에서 내려오는 순간 후회하지 않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울테니까요.
이렇게 단 한 번의 만족스러운 등판을 위해서 서는 이글스의 선수들을 위해 팬들은 응원합니다. 놀랍게도 꼴찌를 거듭하는 와중에도 한화 이글스의 경기를 찾는 사람들은 오히려 더 많아지고 있다고 합니다. 그 이유를 자신이 한 때 사업에서 실패하고 암흑기를 갈 때에도 한화를 통해서 삶의 희망을 얻었다는 한 팬은 이렇게 말합니다. "오르막이 있으면 내리막이 있듯이 자기 인생의 힘든 시기가 어떤 사람이든 누구나 있잖습니까? 야구가 사람 인생하고 비슷한 것 같아요. 오면 지든 이기든 간에 내가 확 트인 곳에서 마음껏 응원도 하면서 지금까지 살아왔습니다."
저는 이 방송을 보면서 한 가지 머릿속을 스쳐지나가는 작품이 있었습니다. 바로 박민규 작가의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입니다. 이 작품은 비슷한 소재(만년꼴찌인 프로야구 구단)를 다루면서도 다큐 3일에 등장하는 이글스의 모습과는 대조를 이룹니다.
작품의 제목에 등장하는 삼미 슈퍼스타즈는 실존했던 대한민국의 프로야구 구단입니다. 후에 청보라는 기업에게 팔려서 청보 핀토스가 될 때까지 잠깐의 전성기를 거친 후에 끝없는 부진에 시달리던 팀이었죠. 박민규 작가는 작품에 등장하는 삼미 슈퍼스타즈의 팬을 통해 삼미 슈퍼스타즈의 야구를 이렇게 평합니다. "치기 힘든 공은 치지 않고, 잡기 힘든 공은 잡지 않는다!"
현실에서 이런 말을 하면 흔히 돌아오는 말은 "프로의식이 없다"거나 "엉터리 야구를 한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프로의식'에서 '프로'가 의미하는 것이 '프로패셔널(professional,직업적인,전문직)'임을 깨닫는다면, 결국 '프로의식'이란 자신의 육체적 능력을 최대한 발휘하여 승리하는 것이 돈을 받기 위한 조건임을 잘 의식하는 것에 지나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 주변의 '제대로 된 야구'란 결국 이런 것들이지요. 사실 한화 이글스의 선수들에게 요구되는 야구도 이런 야구일 겁니다.
하지만, '삼미 슈퍼스타즈의 야구'는 이런 야구에 저항합니다. 이기기 위해서라면 갖은 수를 다 써야 하고, 아득바득 이기기 위해 밟고 올라서기 위해 더 크고, 더 빠르고, 더 많이 일하고, 더 많이 모아야하는 경쟁을 거부하는 것이죠. 그래서 내 글로브 안으로 공이 들어와준다면야 놓치지 않겠지만, 구태여 먼 곳에 떨어지는 것까지 잡으려고 하지는 않는 것입니다.
저는 어쩌면 삼미 슈퍼스타즈의 이런 엉터리 야구야말로 오늘날 우리가 잊어버린 진짜 야구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남을 위해, 돈을 위해 '이기지 않으면 더 이상 행복할 수 없게 되어버린 야구'가 아니라, 자기를 위해 만족을 위해 '나 스스로 행복할 수 있는 수준까지 최선을 다하는 야구' 말입니다. 애석하게도『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은 이런 진짜 야구를 사랑하는 이들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말합니다. '마지막' 팬클럽이라는 제목부터가 앞으로 이런 야구를 사랑할 수 있는 사람들이 점점 더 줄어들 것이라는 것을 암시하고 있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한화 이글스의 팬클럽이 이러한 진정한 야구를 사랑하는 '영원한' 팬클럽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을 봅니다. 아무리 응원하는 선수들이 지고 또 지더라도, 꼴찌를 탈출하지 못하더라도 그저 이기는 것에만 집착한 나머지 상심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이글스라서 좋다는 팬들이 늘어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기는 야구여서가 아니라, 그저 즐기는 야구라서, 변변찮은 내 삶을 닮은 꼴찌의 야구라서 좋을 수만 있다면, 그곳에 이미 진정한 야구의 씨앗이 살아 숨쉬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이기지 못해 안달이 난 세상에서도 꼴찌의 야구를 사랑할 수 있다면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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