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에 어울릴 '초호화' 말고 '초감성' 음반
―브로콜리너마저 2집 『졸업』 듣기
지난 10월 22일 금요일, 슈퍼스타K2 결승전 시상 무대에 배철수 씨가 나왔었죠? 한국 대중음악의 전설적인 인물이 오디션 프로그램에 시상자로 참여하는 모습에 텔레비전으로 지켜보던 저도 깜짝 놀랐었습니다. 배철수 씨는 김성주 아나운서처럼 온갖 말들로 지켜보는 사람들의 혼을 쏙 빼놓고 허각에게 우승 타이틀을 줬었죠. 그런데 저는 유독 배철수 씨의 이 말이 기억에 남습니다.
“초호화 음반 발매! … 내가 여태껏 음악하면서, ‘초호화 음반’이란 말은 본 적이 없는데.”
그렇습니다. 세상에 초호화 음반이라는 말은 없습니다. 초호화 문학, 초호화 미술이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습니까? 없지요? 예술이라는 것이 호화롭다고 잘난 게 아니고 가난하다고 찌질한 것이 절대 아니니까요. 물론 음악도 마찬가지입니다. 비록 돈 잘 버는 스타가 아니더라도 좋은 작품을 만드는 예술가는 반드시 생기기 마련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이번에 2집 『졸업』을 낸 브로콜리너마저가 우여곡절을 거쳐서 점점 그 영역에 도달하고 있지 않나 싶은 생각이 드네요.
원래 저는 이 음반을 리뷰하기 전에 제가 최근에 샀던 음반들―이소라 7집, 이적 4집 『사랑』, 존 레논 & 오노 요코의 『Double Fantasy (Stripped Down)』―중 하나를 먼저 골라서 쓸까 했었어요. 이소라는 저를 CD 한 장으로 울게 만들었고 이적은 뻔한 사랑 얘기에 말 그대로 ‘이야기’를 심었고 존 레논의 이번 리마스터링 앨범은 좋은 음악을 반감시키는 성의 없는 CD케이스 디자인에 할 말이 많았거든요. 하지만 이것들을 제치고 며칠 전 예약구매로 산 브로콜리너마저 2집 『졸업』을 리뷰로 써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뭐랄까. 이적의 음반은 봄이 생각나고 존 레논의 음반은 여름이나 겨울이 생각난다면, 브로콜리너마저는 딱 지금의 가을이 생각나거든요. (물론 이소라의 음반도 딱 늦가을이 생각나지만, 리뷰를 쓸 시기를 놓친 것 같아서요. 그냥 이 말씀만 드릴게요. 일단 들어보세요. 안구에 습기 차는 거 보장합니다.)
자, 그럼 본격적으로 브로콜리너마저의 공식 2집! 『졸업』을 살펴볼게요. 『졸업』은 브로콜리너마저가 2년 만에 발표한 그들의 두 번째 공식 앨범입니다. 전통적으로(?) 브로콜리너마저는 담백한 음색에 눅눅한 감성을 담아 표현해내는 데 탁월한 기질은 보였는데요. 1집 발표 후 그 담백한 보컬의 쌍두마차 중 하나였던 계피가 탈퇴한 후 이 흐름이 좀 어색하게 죽어버리지는 않을까 하는 고민이 있었습니다. 브로콜리너마저의 첫 히트곡 「앵콜요청금지」도 계피의 담담하면서도 구슬픈 목소리가 빚어낸 작품이었고 1집의 다수가 계피의 영향력 아래 있었다 해도 과언은 아니니까요.
하지만 브로콜리너마저는 싱글 『잔인한사월』의 발표와 이번 『졸업』 발표를 통해 덕원 메인보컬-잔디 백보컬 체제를 일단 완성한 것으로 보입니다. 물론 앨범 초반부와 끝부분에 잔디가 괜찮은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지만, 곡 대다수가 덕원의 목소리로만 채워져 예전 앨범과는 달라질 수밖에 없었지요. 사실 계피의 보컬에 비해 덕원의 그것은 어찌 들으면 너무 심심하다는 기분이 듭니다. 공부만 하는 안경잡이 꼬마아이가 장기자랑 시간에 등 떠밀려 나와서 노래를 부른다는 느낌이 들었다고 할까요. 그래도 이것이 덕원의 순박한 매력을 자아내게 합니다. 브로콜리너마저의 곡을 만드는 이도 덕원이기에 이번 2집은 리더 덕원의 느낌이 더욱 짙게 묻어나고 있지요. 그렇지만 여성멤버가 셋이고 남성멤버가 덕원 하나뿐인 밴드에 여자보컬의 존재감이 떨어진다는 건 개인적으로 아쉬운 부분입니다. 작년에 《음악여행 라라라》에 출연해 계피가 부른 노래들을 무난하게 소화한 잔디를 보고 기대했던 것을 생각하면 더욱 그랬죠. 덕원의 목소리가 듣기 싫다는 건 아닙니다. 좀 더 나아질 잔디의 보컬을 기대한다고 해두지요.
독특한 이름만큼 독특한 음악세계, 그들만의 따뜻함을 자랑한다
이제 곡 하나하나를 들어봅시다. 『졸업』에는 총 11개의 트랙과 한 개의 히든 트랙이 있습니다. 히든 트랙이라 해도 마지막 곡 「다섯 시 반」을 멤버들이 합창한 버전이라 처음 들었을 때 앨범에 여운이 남고 신기하다는 느낌 빼고는 별로 새로운 기분은 안 듭니다. 그렇지만 『졸업』에 실린 11개의 메인 트랙은 하나하나가 각자 무게감이 있지요. 그 무게감의 원인은 두 가지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1집과 비슷한 느낌이지만 더욱 심플하면서 원숙해진 브로콜리너마저만의 음악적 분위기라 할 수 있겠고요. 둘째는 가사에서 뿜어져 나오는 일상적이면서도 치명적인 메시지에 있습니다. 가사를 중심으로 하나하나 설명을 드려볼게요.
먼저 「열두 시 반」으로 『졸업』의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눅눅한 버스를 타고’ 졸다가 엉뚱한 정류장에 내린 에피소드를 담고 있는데요. 잔디와 덕원이 번갈아 노래하며 밤 열두 시 반의 ‘지친 어깨’를 잘 표현해내고 있습니다. 새벽에 어딘가에서 들릴 법한 소음이 커지다 갑자기 끝나고, 영롱하고 구슬픈 반주로「사랑한다는 말로도 위로가 되지 않는」이 시작됩니다. 이 노래가 어쩌면 이 앨범에 수록된 곡들 중에서 가장 슬픈 노래가 아닌가 싶네요. 위로해주고 싶지만 위로할 말이 없는, 그런 아프고 힘든 이야기를 맑고 슬픈 피아노와 헤비한 기타 사운드를 통해 성공적으로 엮어내고 있습니다. 덕원이 높은 톤으로 열창하는 후렴구, ‘사랑한다는 말로도 위로가 되지 않는’ 는 많은 감정을 불러일으키지요. 노래 막판에는 잔디도 보컬에 가세해 더욱 청자를 뭉클하게 만듭니다.
「변두리 소년, 소녀」는 아픔 속에서도 날개를 달고 날아갈, 희망을 잃지 않는 소녀를 보며 ‘나는 네가 좋아.’ 라고 하면서도 ‘하지만 난 아닌걸.’ 이라고 되뇌이는 묘한 감정을 몽환적인 사운드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마치 소녀가 하늘 위로 날아가는 모습을 멀리서 물끄러미 바라보는 모습이랄까요. 이어서 묵직한 기타소리로 시작을 끊는 「커뮤니케이션의 이해」는 마치 교양과목 같은 노래제목처럼 철학적인 목소리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후렴구의 끝부분 가사 ‘꼭 맞는 만큼만 말하고 싶어.’ ‘좀 말 같은 말만 들어보고 싶어.’ 가 이 노래의 주제를 함축하고 있다 할 수 있겠네요. 진실 된 대화가 이루어지지 않는 현대사회를 강하고 슬프게 읊조리고 있습니다.
습기 찬 사운드는 5번 트랙 「울지 마」에서도 이어집니다. 이 때 들어서 2집에서 말하려 하는 위로의 메시지가 더욱 직접적으로 드러나지요. 처음에는 울지 말라고 해주고 싶다는 목소리가 잔잔한 사운드를 타고 맛깔나게, 천천히 흘러나옵니다. 이후 후렴구 들어 감정이 폭발하면서 소리가 커지죠. ‘왜 잘못하지도 않은 일들에 가슴 아파하는지 / 그 눈물을 참아내는 건 너의 몫이 아닌데’ 라고 목소리를 높이죠. ‘약한 사람들’에게 흔히 일어나는 슬픈 순간들을 노래 속에 담았다고 하겠습니다. 개인적으로 제일 마음에 드는 노래입니다.
(그렇다면 제가 좋아하는 세 곡 중 남은 하나는 무엇일까요? 돌발이벤트입니다 맞혀보세요!)
다음 노래 「마음의 문제」에 들어서부터는 사운드가 1집 초반 트랙의 싱그럽고 말랑한 느낌으로 펼쳐집니다. 하지만 가사의 묵직함은 녹록치 않죠. ‘말하지 못한 말들이 가슴에 남아 잠들 수 없었죠 / 어쩔 수 없어요 결국 당신 마음의 문제이니까’ 이 두 줄만으로 사람의 폐부를 찌르고 있습니다. ‘정작 미안해야 할 사람들은 다 / 그건 너의 문제니까 어쩔 수 없다 말해요’ 라고 말하며 주제를 확실히 살리고 있습니다. 사과 받아야 하는 사람들이 오히려 ‘그건 네가 문제야’ 라는 말을 많이 듣잖아요. 그런 안타까운 순간을 희화화하여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이젠 안녕」도 그 기세를 이어서 가볍게 몸을 흔들어댈 만한 소리에 하고 싶은 말도 하지 못하며 멀어지는 이별의 메시지를 담아 흘러나옵니다.
「할머니」들어서 브로콜리너마저는 앨범이 이제 반환점을 돌았다는 사실을 일러줍니다. 할머니가 ‘이제는 니가 이래 마이 컸는데 내가 언제까지 살라 카는지’ 라고 걱정하는 모습을 화자가 안타까워하는 모습을 담고 있는 노래입니다. 이때부터 노래들은 더 이상 헤비해지지도 않고 신나지도 않고 사람의 속을 그야말로 잔잔히 침전하듯 가라앉히죠. 다만 이 노래는 할머니의 목소리를 담아 사투리로 랩을 하는 덕원의 보컬이 재미있습니다. 스튜디오에서야 감정을 최대한 잡아서 불렀겠지만 라이브로 부르면 어떤 일이 일어날지 궁금한 노래 중 하나입니다. 「할머니」가 끝나면 이제 이 앨범의 표제작인 「졸업」에 앞서 「환절기」란 노래가 나옵니다. 다시 묵직한 기타소리가 납니다만 덕원과 잔디가 함께 부르는 보컬은 환절기처럼 서늘하기 그지없습니다. 워낙 조용조용 불러서 가사가 잘 안 들린다는 점은 아쉽네요. 가사집을 보면서 들어도 가사가 쉽게 잘 안 들어올 만큼 시 같은 이야기를 품은 밴드인데 말이죠.
먼 길 왔습니다. 드디어 총 러닝타임 52분에 달하는 『졸업』의 끝, 10번 트랙 「졸업」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이 곡은 처음에 덕원의 나긋나긋한 보컬로 시작합니다. 인간의 심리를 주로 섬세한 감각으로 표현하는 브로콜리너마저는 이 곡만큼은 가사 면에서 가장 직접적인 모습을 보여줍니다. ‘너도나도 어학연수를 떠나는’ ‘이 미친 세상에 어디에 있더라도 행복해야 해.’ 라며 이 세상이 어떤가 하는 생각을 너무나 확실히 드러내고 있습니다. 2절 들어서 잔디가 가세해 이야기를 풀어냅니다. 앞만 보고 달려가는 세상 속에서 ‘어디쯤 가야만 하는지 / 벌써 지나친 건 아닌지’ 알지 못하는 모습을 노래하지요. ‘자리를 찾으려’ 헤매는 우리 대학생들에게 정말 확 와 닿는 노래라고 자부합니다. 브로콜리너마저는 노래 막판에 ‘어디에 있더라도 있지 않을게.’ 라며, 우리에게 이제야 제대로 된 위로를 건네줍니다. 마지막 곡 「다섯 시 반」은 첫 곡 「열두 시 반」을 잇는 곡입니다. 「열두 시 반」 2부라고 하면 좋겠네요. 마치 새벽 다섯 시 반에 방에 있는 친구가 옆에서 나긋나긋 불러주는 기분입니다.
'이 미친 세상'에서 빨리 졸업하고픈 느낌이랄까
사실 저는 『졸업』이 전작 『보편적인 노래』만큼의 감동을 이끌어내지는 못했다고 생각합니다. 개별적인 곡들의 완성도와 존재감은 좋지만 앨범 전체적인 기승전결을 완성도 있게 보여주는 데 실패했다고나 할까요. 마치 레알 마드리드의 갈라티코처럼 말이지요. 그만큼 『보편적인 노래』에서 느낀 앨범의 힘이 많이 기억에 남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1집은 트랙 순서대로 조금씩 청자들의 감정을 천천히 끌어올려 「앵콜요청금지」와 「보편적인 노래」로 맺힌 눈물을 왈칵 터뜨리고 「유자차」로 그 눈물을 닦아주는 데 아주 능수능란했거든요. 하지만 이번 『졸업』은 노래 하나하나의 감정표현이 풍부하고 ‘위로’라는 일관된 주제를 담고 있지만 앨범 전체적인 완급 조절에는 아쉬운 모습을 드러냈다고 봅니다. 초반부에 있는 노래들의 임팩트가 크다 보니 후반부의 곡들이 불타오르지 못하고 심심하네요. 물론 노래 하나하나 따로 들으면 하나같이 정말 좋지요. 꼭 옆에 가사를 끼고 그것들을 읊조리고 가슴에 느끼며 들었으면 좋겠습니다.
10월 25일에 발매된 『졸업』은 오늘 인터넷에 음원이 공개된다고 하네요. 그래도 음반을 사서 듣는 것을 가장 추천합니다만, 인터넷을 통해서라도 새롭게 발현되는 브로콜리너마저의 매력을 마음껏 느껴보시기를 바랍니다. 자본에 상관없이 완성도 있는 젊은 음악을 만나실 수 있을 겁니다. 귀를 따갑게 때리는 소리가 아니라, 가슴을 뜨겁게 문지르는 음악 말이죠. 위로 섞인 뻔한 말들이 더 이상 쿠플존 식구들의 마음을 움직이지 못한다면, 이 앨범을 격하게 추천합니다. 제 점수는요…….
p.s. 1. 쿠플광장을 보니 세종인 님이 명곡(이라 할 만한) 「사랑이라는 말로도 위로가 되지 않는」을 올려두셨더군요. ㅋㅋ 좋네요.
p.s. 2. 생활도서관에 오시면 위에서 말한 제 음반들을 들으실 수 있을 거예요. ^^ 문의 주세요. (음원 파일 복사해달라는 말은 마셔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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