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계를 보니, 약 먹을 시간이 다 됐다. 입에 약을 털어 넣자 앞에 있던 친구가 걱정스러운 눈빛을 하곤 물었다. “괜찮아?” 나는 대답했다. “보시다시피~”
HIV는 에이즈를 일으키는 원인 바이러스다. 에이즈는 HIV에 감염돼 나타나는 증상으로, HIV 감염인이라고 해서 모두 에이즈 환자는 아니다. 우리는 3~6개월에 한 번 병원을 방문해 약을 받는데, 이 약만 제대로 먹으면 일상적으로 별반 다를 것 없는 사람들이다.
내가 HIV 감염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건 병원에서였다. HIV가 의심돼 자발적으로 검사를 받으러 갔던 건 아니었다. 심한 장염에 걸려 병원에 입원하던 중 피검사 항목에 포함된 HIV 검사에서 양성이 뜬 것이었다. 병원에서도 정확한 원인을 말해주는 게 아니니 혼자서 ‘대체 내가 왜?’ 질문을 던지고 추측만 반복할 뿐이었다.
병원 측에 정신적인 상담이라도 받고 싶었지만, 그럴 순 없었다. 거점 병원에는 HIV 환자 전문 상담 간호사들이 있긴 하지만, 초기 감염인이라 만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보건소로 갔더니 책자 하날 쥐여줬다. “이거 보시면 될 것”이라며 궁금한 게 있으면 질문하라 했다. 떠오르는 질문은 단 하나.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나.’ 목까지 차올랐지만 이걸 물어볼 수도 없는 노릇이란 생각에 입을 다물었다.
마쳐놓은 입대 준비도 무용지물이 됐다. 입대 예정자는 HIV 감염 사실이 알려지면 자동으로 면제된다. 당장 지인들에게 말할 면제 이유가 필요했다. 나는 체중 문제와 집안 사정 등 여러 가지가 겹친다고 둘러댔다. 다른 감염인은 군내 건강검진에서 HIV 감염 사실을 알게 돼 의병 제대했다. 후천성면역결핍증 예방법에 따르면 감염 사실은 관할장이나 의료담당자 이외에 발설이 금지돼 있지만, HIV는 격리 조치가 행해져 입소문을 타기 마련이라고 했다.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은 고민거리가 한꺼번에 몰려오자 머리가 아팠다. 부모님께도 말할 수 없었다. 사회적 편견이란 게 우리 가족한테는 통용되지 않을 것이란 확신이 들지 않았으니…. 부정적인 생각이 들 때 위로가 된 건 친구들이었다. 오히려 나보다 더 힘들어하는 친구도, 대수롭지 않게 “응 그래”하며 밥이나 먹자고 했던 친구도 있었다.
편견 없이 대해주는 친구들이 있는 게 행운인지도 모르겠다. 이 사회엔 여전히 HIV에 대한 오해와 차별이 많다. 작년만 하더라도, HIV 환자라는 이유로 치료를 거부당한 사례가 있었다. 서울특별시보라매병원에서 “환자의 침이 튀게 돼 감염의 우려가 있으므로 별도의 분리된 공간이 필요하다”며 치과 스케일링을 거부한 것이다. 병원장의 사과가 있고 난 뒤 치료를 진행했지만, 파티션과 의자 등 진료실은 전부 비닐에 뒤덮여 있었다.
HIV/AIDS는 침으로는 감염되지 않는다. 이 사실을 모르는 건지, 아직도 막연한 두려움이 남아있는 건지 답답할 뿐이다.
우리는 사회적 약자도, 불쌍한 사람도 아니다.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20대로서, 그저 연애와 취업이 가장 큰 걱정인 사람들이다. 그러나 또 한 번 ‘HIV’라는 병명은 우리의 발목을 잡는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경찰을 꿈꿔왔지만, 당장 진로를 변경해야 했다. HIV 환자는 경찰·소방 공무원, 군인이 될 수 없다. 업무 중 유혈사태 발생 시 동료들이 감염에 노출된다는 이유에서다. 선원이나 스튜어디스도 안 된다. 약 복용 시기를 놓칠 수 있어 업무에 지장이 있다는 것이다. 일반 회사에 취직해도 긴장의 끈은 놓을 수 없다. 정식 채용 직전에 행해지는 채용신체검사와 채용 후의 직장건강검사에 HIV 검사 항목이 포함된 곳도 적지 않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HIV라서 차별한다고 확신할 순 없지만, 건강검진에 포함된 것. 그것 자체로도 ‘아웃팅’의 두려움이 된다. 국가에선 HIV 항목을 포함시키지 마라고 권고하지만, 권고에서 그칠 뿐이다.
한국에서 HIV 환자가 처음 보고된 그때부터 우리와 현실의 벽은 높아져만 갔다. 당시 반응은 사회가 에이즈를 대하는 방식을 상당 기간 고착시켰다. 정부 정책안은 ‘강제처분’이란 이름으로 감염인을 격리시켰고, 매스컴도 反에이즈집단의 이야기를 담아왔다. 학교에서도 HIV/AIDS 환자의 처량한 모습을 비추는 이미지 교육을 했다. 이렇게 자극적인 인상을 자주 접하면서 사람들은 사실로 받아들이기도 하고, 사실이 아닌 걸 알면서도 무의식중에나마 자신과 우리를 격리시킨다.
오늘도 많은 HIV 감염인들은 질문받을 것이다. “몸도 안 좋은데, 쉬어야 하는 거 아니니?”
걱정해주는 건 고맙지만, 우린 아프지 않다.